사도행전 2016년 행5강(4:32-5:16)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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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5 강
말씀 | 사도행전 4:32–5:16
요절 | 사도행전 4:32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오늘 말씀은 초대 교회가 외적인 핍박을 극복한 후에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성장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에 교회는 또 내적인 어려움을 받습니다. 교회가 내적인 문제와 도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 내적 어려움을 극복할 때 교회는 다시 힘있게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여러 모양의 어려움과 환난을 겪으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교회. 초대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마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자들이 헌금을 하여 형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거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발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이 빚어낸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33-3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산 삶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마음에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자기 것을 챙기기보다 나누어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재물이 많다고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소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현실 중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의 영생을 확신하며 이 땅에서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늦어지면서 교회는 세상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신앙은 약화되며 세속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희미해져가고 이 세상이 천국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살아도 사람은 일시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의 형태는 아주 달라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주님을 섬기며 서로 사랑한 것을 힘써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탐심을 회개하고 탐심과 부단히 싸우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매여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탐심입니다. 우리는 사명에 충실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삶을 힘써 감당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애양원에 갔을 때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 장례식 때 드린 감사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순교의 두 아들이나 주신 감사의 봉헌금, 일만환. 순교 2자의 부 손양원.” 이 일만환의 돈이 오늘날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 되는 물질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그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까 의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의 누나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는데 조카, 동인, 동신 미국 유학 보낼 때 쓰라고 돈을 부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냈으니, 그 물질을 몽땅 헌금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부활을 확실히 믿고 천국소망이 충만한 하였기 때문에 이 땅의 물질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물과 자식과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역사에 헌신하였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바나바라는 사람은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삶에서 모범을 보이고 영향력이 좋았습니다. 위로의 아들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왔습니다. 바나바의 믿음과 헌신은 초대 교회 공동체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동시에 이를 시기하는 사탄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됨.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의 선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좋은 영향력이 알려지자 이것이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평소에 잘 가 보지 않던 땅을 팔았습니다. 갑자기 그 동네에 개발 붐이 불어서 지가가 매우 높게 뛰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손에 들어오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 드리자니 아까웠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리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사는가 염려와 불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소유를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 아내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3,4).” 아나니아는 땅을 팔던 말던 자기의 자유인데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그가 돈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소유를 팔고 거기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 놓았습니다. 다 바쳤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속이고 뒤로는 자신의 것을 챙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탄생한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를 씻김 받고 성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탐심과 거짓으로 인해서 교회는 더럽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죄를 공동체의 죄로 다루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 때 있었던 아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때에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나서 아간이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탐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와 은덩어리, 외투를 탐내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분기충천하여 아이 성 전투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더러워진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패배라는 쓴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그 원인을 찾았는데 아간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아간과 그 가족과 그의 모든 소유를 아골 골짜기로 가져다가 불태우고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순님의 피로 거룩하게 된 백성으로서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된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약한 자는 약한 자답게 없는 자는 없는 자답게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한 공동체인데 서로를 속이고 거짓으로 더럽게 되면 오래 가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아나니아의 문제를 강하게 다루십니다. 한 사람의 죄악된 영향력은 실로 파괴적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이중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외식의 문제를 회개해야 합니다. 탐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8a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요, 진리의 영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거짓의 영이요, 속이는 영입니다. 사탄은 항상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의 본질을 잘 알았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7:9-11).”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거짓되기 때문에 탐심에 눈이 멀 수 있습니다. 그때 자고새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고새는 욕심이 많아서 자기가 낳은 알 뿐 아니라 다른 새의 알까지 훔쳐다가 품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 언젠가는 다 날아가고 맙니다. 결국 자기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잠언에도 있습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 가리라(잠 23:5).” 사업을 아무리 잘 해도 30년을 넘기는 기업이 20%를 넘지 못합니다. 대부분 10년이면 잘 나가던 사업도 힘들어집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든가 알 수 있습니다. 탐심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 쯤 지나서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그녀는 “예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심히 상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그러자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였습니다. 이 집안은 하루 아침에 줄초상이 났습니다. 이것을 보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주인이 되어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구약 교회에서도 엘리 제사장 가족이 하나님의 제물을 훔치고 하나님을 경홀히 대했을 때 온 가족이 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실함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거짓되지 않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겨주셨습니다.
셋째, 확장되어 가는 교회 사역.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한 거짓과 속임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예수님 사역의 계승자들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한 치유와 기적의 역사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바탕이 되어서 응답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4:29-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힘쓰도록 명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2-14).” 기도는 말씀의 권세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실제적인 치유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구하든지 자신이 친히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께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언덕 위의 도시와 같이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그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자들과 감히 상종하지는 못하지만 칭송하였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신자로써 사는 것이 어렵지만 존경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를 무시하는 세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선도해 나가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탓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사탄이 복음 역사를 방해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거룩성과 순결성을 회복하게 하시고 다시 영적인 사역에 집중했을 때 다시 하나님의 권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여러모로 성령의 불길을 끄고자 하지만 이를 인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정결케 되는 일에 힘을 쓸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내적으로 정결케 하시고 각 지역을 치유하고 정결케 하시는 역사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내적 외적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초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기 죄를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4:32–5:16
요절 | 사도행전 4:32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오늘 말씀은 초대 교회가 외적인 핍박을 극복한 후에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성장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에 교회는 또 내적인 어려움을 받습니다. 교회가 내적인 문제와 도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 내적 어려움을 극복할 때 교회는 다시 힘있게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여러 모양의 어려움과 환난을 겪으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교회. 초대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마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자들이 헌금을 하여 형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거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발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이 빚어낸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33-3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산 삶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마음에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자기 것을 챙기기보다 나누어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재물이 많다고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소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현실 중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의 영생을 확신하며 이 땅에서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늦어지면서 교회는 세상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신앙은 약화되며 세속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희미해져가고 이 세상이 천국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살아도 사람은 일시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의 형태는 아주 달라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주님을 섬기며 서로 사랑한 것을 힘써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탐심을 회개하고 탐심과 부단히 싸우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매여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탐심입니다. 우리는 사명에 충실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삶을 힘써 감당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애양원에 갔을 때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 장례식 때 드린 감사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순교의 두 아들이나 주신 감사의 봉헌금, 일만환. 순교 2자의 부 손양원.” 이 일만환의 돈이 오늘날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 되는 물질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그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까 의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의 누나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는데 조카, 동인, 동신 미국 유학 보낼 때 쓰라고 돈을 부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냈으니, 그 물질을 몽땅 헌금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부활을 확실히 믿고 천국소망이 충만한 하였기 때문에 이 땅의 물질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물과 자식과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역사에 헌신하였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바나바라는 사람은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삶에서 모범을 보이고 영향력이 좋았습니다. 위로의 아들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왔습니다. 바나바의 믿음과 헌신은 초대 교회 공동체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동시에 이를 시기하는 사탄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됨.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의 선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좋은 영향력이 알려지자 이것이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평소에 잘 가 보지 않던 땅을 팔았습니다. 갑자기 그 동네에 개발 붐이 불어서 지가가 매우 높게 뛰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손에 들어오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 드리자니 아까웠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리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사는가 염려와 불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소유를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 아내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3,4).” 아나니아는 땅을 팔던 말던 자기의 자유인데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그가 돈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소유를 팔고 거기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 놓았습니다. 다 바쳤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속이고 뒤로는 자신의 것을 챙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탄생한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를 씻김 받고 성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탐심과 거짓으로 인해서 교회는 더럽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죄를 공동체의 죄로 다루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 때 있었던 아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때에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나서 아간이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탐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와 은덩어리, 외투를 탐내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분기충천하여 아이 성 전투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더러워진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패배라는 쓴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그 원인을 찾았는데 아간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아간과 그 가족과 그의 모든 소유를 아골 골짜기로 가져다가 불태우고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순님의 피로 거룩하게 된 백성으로서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된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약한 자는 약한 자답게 없는 자는 없는 자답게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한 공동체인데 서로를 속이고 거짓으로 더럽게 되면 오래 가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아나니아의 문제를 강하게 다루십니다. 한 사람의 죄악된 영향력은 실로 파괴적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이중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외식의 문제를 회개해야 합니다. 탐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8a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요, 진리의 영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거짓의 영이요, 속이는 영입니다. 사탄은 항상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의 본질을 잘 알았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7:9-11).”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거짓되기 때문에 탐심에 눈이 멀 수 있습니다. 그때 자고새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고새는 욕심이 많아서 자기가 낳은 알 뿐 아니라 다른 새의 알까지 훔쳐다가 품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 언젠가는 다 날아가고 맙니다. 결국 자기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잠언에도 있습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 가리라(잠 23:5).” 사업을 아무리 잘 해도 30년을 넘기는 기업이 20%를 넘지 못합니다. 대부분 10년이면 잘 나가던 사업도 힘들어집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든가 알 수 있습니다. 탐심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 쯤 지나서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그녀는 “예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심히 상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그러자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였습니다. 이 집안은 하루 아침에 줄초상이 났습니다. 이것을 보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주인이 되어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구약 교회에서도 엘리 제사장 가족이 하나님의 제물을 훔치고 하나님을 경홀히 대했을 때 온 가족이 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실함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거짓되지 않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겨주셨습니다.
셋째, 확장되어 가는 교회 사역.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한 거짓과 속임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예수님 사역의 계승자들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한 치유와 기적의 역사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바탕이 되어서 응답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4:29-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힘쓰도록 명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2-14).” 기도는 말씀의 권세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실제적인 치유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구하든지 자신이 친히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께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언덕 위의 도시와 같이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그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자들과 감히 상종하지는 못하지만 칭송하였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신자로써 사는 것이 어렵지만 존경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를 무시하는 세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선도해 나가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탓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사탄이 복음 역사를 방해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거룩성과 순결성을 회복하게 하시고 다시 영적인 사역에 집중했을 때 다시 하나님의 권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여러모로 성령의 불길을 끄고자 하지만 이를 인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정결케 되는 일에 힘을 쓸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내적으로 정결케 하시고 각 지역을 치유하고 정결케 하시는 역사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내적 외적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초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기 죄를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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