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26강(28:1-31) 로마의 셋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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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도행전 26 강
말씀 | 사도행전 28:1-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로마의 셋집에서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제 사도행전 공부 마지막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광풍을 만나 죽을 고비에 놓이게 되었지만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돕고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복음을 전하여 그 섬에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셋집 감옥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매인 몸, 갇힌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복음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개척 정신을 배우고 사도행전 역사의 계승자들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멜리데 섬 복음화(1-10). 바울 일행이 구조된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서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영접했습니다. 비를 맞고 추위와 피곤으로 사람들은 지쳐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배려로 따뜻하게 몸을 덥히니 졸음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피곤하고 귀찮아서 어디에라도 누워버리고 싶습니다. 이때 바울은 불 옆에서 자기 몸을 따뜻하게 하기보다는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섬기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생활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남을 배려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숙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불에 넣자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나무단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뛰쳐나와 그의 손을 꽉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짐승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했습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자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이라.”
보통 독사에게 물리게 되면 죽는 것 아닌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독을 빨아내며 난리를 칠 것입니다. 더구나 원주민들이 이제 당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태연히 뱀을 불에 떨어버립니다. 삶과 죽음문제에 초연한 믿음을 가진 바울입니다. 바울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명인 바울의 가는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즉 ‘네가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행27:24)’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바울을 독사의 독으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마치기까지 주님은 나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이 끝났을 때 주님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많은 일을 하기보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벌려놓기보다 한 가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집중하기를 기도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보블리오였습니다. 그는 그 근처에 토지가 있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였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대접하고 그들이 떠날 때에 쓸 것을 배에 실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멜리데 섬 사람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나음을 받게 되자 성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보불리오는 이때 복음을 영접하고 멜리데 섬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멜리데 섬에는 바울의 기념교회가 있고, 그 지역이 100% 복음화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일행이 어쩌다보니 광풍에 밀려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멜리데 섬에 보내졌습니다. 광풍이 불어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밀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팔레스타인 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풍을 쓰셔서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건강을 회복하고 기쁨이 충만하자 바울 일행이 로마로 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배에 실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광풍을 만나 배에 있던 모든 것을 버렸지만 기이한 방법으로 다시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만나로 또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소망(11-29). 석 달 후 그들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고 이레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내리자 그 땅에 키스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 곳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로마에서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전쟁에 승리한 로마 장군의 영광스러운 개선을 열렬히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트레이스 타베르네는 로마에서 50km떨어진 곳 인데 세 개의 여관이라는 뜻으로 개선 군사들이 로마에 입성하기 전에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숙소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자립적으로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또 자신을 맞이하고자 먼 길을 온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줄 때 담대해졌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온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형제들의 뜨거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되었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인은 그를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마지 못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그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메시야가 오시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수차례 이 소망으로 인하여 심문을 받았음을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부활의 도 전함을 싫어함으로 인해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헛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며 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여 핍박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 가운데 복음을 전도하니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바울에게 찾아온 유대인들은 그에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들은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불신앙과 완악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니 심판받는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것임을 알도록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들을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늘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을 때 이방인에게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받고 그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구원 역사를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계의 머리가 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로마는 천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나라로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영적인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셋째, 바울의 셋집 역사(30,31). 30,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만 2년을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거침없이’는 ‘방해 없이, 자유로이’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입니다. 바울이 셋집에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끝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이 했던 셋집의 일대일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나지만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전파되어나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저항과 방해와 박해가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뚫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갔습니다. 바울이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딤후2:9). 오늘날 복음 전파에 대한 방해와 반대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전도에 대한 문을 닫고 있고 캠퍼스에서의 전도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전파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도 바울처럼 어떤 모습으로든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로서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대로 일대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로마에도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바울의 기도와 열정대로, 바울의 셋집의 일대일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 결국 로마에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게 됩니다. 로마 복음화의 비전 가운데 감옥 셋집에서 찾아오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던 바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감옥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바울을 통해서 외적인 환경을 모두 극복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믿음과 스피릿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이 머물고 있는 셋집은 그 안에서의 활동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엄연한 감옥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양들을 섬기거나 심방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형편이나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므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로마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보통 우리가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감옥에서 풀려나야 복음을 전하고 양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고난 중에 있을 때 힘을 발휘하고 놀랍게 역사합니다. 복음은 말구유에서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고난의 때에 전파됩니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 선교의 위대한 환상을 일대일 성경공부로 현실화시켰습니다. 셋집 감옥으로 찾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온 로마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가 가진 환상과 비전에 비교할 때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25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한 역사는 400년 후에 200만명이 넘는 자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일대일 성경 공부가 후에는 온 로마를 변화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과 찾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써서 멀리 있는 교회들을 섬겼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을 썼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를 보면 복음의 능력이 먼저는 그를 지키던 죄수들에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빌1:13). 그리고 다음으로 가이사 황실 사람에게까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4:22). 바울의 일대일 성경공부는 그로부터 약 250년 후인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함으로 기독교가 공인됩니다. AD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까지 선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럽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UBF 공동체의 역사도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역사였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될 때, 그를 통해서 또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대일 성경공부의 오병이어를 받으셨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300개 캠퍼스와 세계 96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 각 캠퍼스에서 일대일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의 증거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으로 순수복음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보다 이 순수복음을 전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과 캠퍼스 양들과 일대일로 나누는 일은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 역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줄기차게 일대일 말씀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구원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8:1-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로마의 셋집에서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제 사도행전 공부 마지막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광풍을 만나 죽을 고비에 놓이게 되었지만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돕고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복음을 전하여 그 섬에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셋집 감옥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매인 몸, 갇힌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복음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개척 정신을 배우고 사도행전 역사의 계승자들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멜리데 섬 복음화(1-10). 바울 일행이 구조된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서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영접했습니다. 비를 맞고 추위와 피곤으로 사람들은 지쳐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배려로 따뜻하게 몸을 덥히니 졸음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피곤하고 귀찮아서 어디에라도 누워버리고 싶습니다. 이때 바울은 불 옆에서 자기 몸을 따뜻하게 하기보다는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섬기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생활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남을 배려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숙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불에 넣자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나무단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뛰쳐나와 그의 손을 꽉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짐승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했습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자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이라.”
보통 독사에게 물리게 되면 죽는 것 아닌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독을 빨아내며 난리를 칠 것입니다. 더구나 원주민들이 이제 당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태연히 뱀을 불에 떨어버립니다. 삶과 죽음문제에 초연한 믿음을 가진 바울입니다. 바울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명인 바울의 가는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즉 ‘네가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행27:24)’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바울을 독사의 독으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마치기까지 주님은 나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이 끝났을 때 주님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많은 일을 하기보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벌려놓기보다 한 가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집중하기를 기도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보블리오였습니다. 그는 그 근처에 토지가 있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였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대접하고 그들이 떠날 때에 쓸 것을 배에 실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멜리데 섬 사람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나음을 받게 되자 성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보불리오는 이때 복음을 영접하고 멜리데 섬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멜리데 섬에는 바울의 기념교회가 있고, 그 지역이 100% 복음화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일행이 어쩌다보니 광풍에 밀려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멜리데 섬에 보내졌습니다. 광풍이 불어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밀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팔레스타인 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풍을 쓰셔서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건강을 회복하고 기쁨이 충만하자 바울 일행이 로마로 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배에 실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광풍을 만나 배에 있던 모든 것을 버렸지만 기이한 방법으로 다시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만나로 또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소망(11-29). 석 달 후 그들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고 이레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내리자 그 땅에 키스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 곳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로마에서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전쟁에 승리한 로마 장군의 영광스러운 개선을 열렬히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트레이스 타베르네는 로마에서 50km떨어진 곳 인데 세 개의 여관이라는 뜻으로 개선 군사들이 로마에 입성하기 전에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숙소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자립적으로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또 자신을 맞이하고자 먼 길을 온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줄 때 담대해졌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온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형제들의 뜨거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되었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인은 그를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마지 못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그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메시야가 오시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수차례 이 소망으로 인하여 심문을 받았음을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부활의 도 전함을 싫어함으로 인해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헛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며 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여 핍박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 가운데 복음을 전도하니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바울에게 찾아온 유대인들은 그에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들은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불신앙과 완악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니 심판받는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것임을 알도록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들을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늘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을 때 이방인에게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받고 그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구원 역사를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계의 머리가 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로마는 천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나라로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영적인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셋째, 바울의 셋집 역사(30,31). 30,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만 2년을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거침없이’는 ‘방해 없이, 자유로이’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입니다. 바울이 셋집에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끝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이 했던 셋집의 일대일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나지만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전파되어나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저항과 방해와 박해가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뚫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갔습니다. 바울이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딤후2:9). 오늘날 복음 전파에 대한 방해와 반대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전도에 대한 문을 닫고 있고 캠퍼스에서의 전도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전파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도 바울처럼 어떤 모습으로든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로서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대로 일대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로마에도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바울의 기도와 열정대로, 바울의 셋집의 일대일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 결국 로마에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게 됩니다. 로마 복음화의 비전 가운데 감옥 셋집에서 찾아오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던 바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감옥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바울을 통해서 외적인 환경을 모두 극복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믿음과 스피릿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이 머물고 있는 셋집은 그 안에서의 활동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엄연한 감옥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양들을 섬기거나 심방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형편이나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므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로마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보통 우리가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감옥에서 풀려나야 복음을 전하고 양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고난 중에 있을 때 힘을 발휘하고 놀랍게 역사합니다. 복음은 말구유에서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고난의 때에 전파됩니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 선교의 위대한 환상을 일대일 성경공부로 현실화시켰습니다. 셋집 감옥으로 찾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온 로마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가 가진 환상과 비전에 비교할 때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25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한 역사는 400년 후에 200만명이 넘는 자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일대일 성경 공부가 후에는 온 로마를 변화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과 찾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써서 멀리 있는 교회들을 섬겼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을 썼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를 보면 복음의 능력이 먼저는 그를 지키던 죄수들에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빌1:13). 그리고 다음으로 가이사 황실 사람에게까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4:22). 바울의 일대일 성경공부는 그로부터 약 250년 후인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함으로 기독교가 공인됩니다. AD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까지 선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럽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UBF 공동체의 역사도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역사였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될 때, 그를 통해서 또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대일 성경공부의 오병이어를 받으셨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300개 캠퍼스와 세계 96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 각 캠퍼스에서 일대일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의 증거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으로 순수복음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보다 이 순수복음을 전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과 캠퍼스 양들과 일대일로 나누는 일은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 역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줄기차게 일대일 말씀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구원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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