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 23강(24:1-25:12)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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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23 강
말씀 | 사도행전 24:1–25:12
요절 | 사도행전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소망은 환난 가운데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떤 소망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삶의 양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증언을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삶에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으면 먹고 마시는 삶, 쾌락적인 삶, 허무한 생각에 기초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내세를 믿는다면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로마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나의 소망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고소 내용이 무엇입니까?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를 칭찬하며 마음을 얻고자 입을 열었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벨릭스 입장에서는 듣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노예 출신으로서 잔혹하고 뇌물과 여색을 탐하는 자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소요 사태를 진압한 것은 사실이나 소요 진압 과정에서 강도떼들을 부추겨 약탈하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같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행적은 바울을 재판하는 과정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들의 고발 내용은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그들이 볼 때 기독교는 전염병과 같은 확산력이 있었습니다.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져나가듯이 복음은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나갔습니다. 기독교는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였고, 성전을 더럽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 유대인들 편에서는 크게 다루어져야 했지만, 총독에게 는 크게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총독이 볼 때 이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만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문제를 고발했고 유대인들도 이 말이 옳다고 거드니 그는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격에 그들의 주장을 격파하였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되지 않아 무슨 큰일을 저지를 기간이 짧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바울이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이나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바울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고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총독 앞에서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신의 결백함을 보이고자 함이고, 둘째로, 모함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드러내고자 함이며 셋째로, 총독에게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지도자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이단이 실상은 참된 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조상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은 조상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습니다. 그는 이상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똑같은 구약을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소망에 있어서도 종교지도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때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갈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21절에서는 이를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그 생명이 한계적인 사람, 내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죽어서 하나님을 전혀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죽어서 전혀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삶의 의욕과 열정이 죽은 사람도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살아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죽어 있던 사람인데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고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리라는 살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양심으로 살고자 힘썼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바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양심의 거리낌이 있어도 무시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경종을 울려도 무시하고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이 땅에서 잘 먹고 즐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기 위해 양심의 거리끼는 삶을 살지 않고자 힘쓰게 됩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삶이 현실의 삶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 그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그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였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바리새인들도 믿고 있던 교리라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고소를 당한 것은 잘못 때문이 아니라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판단을 연기하였습니다. 벨릭스는 어떻게 이 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요? 그가 유대 지역을 10년 정도 관할하다 보니 들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후에 바울을 불러 듣는 것을 볼 때 그 도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유대 여자였습니다. 아내의 영향으로 복음에 관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혹은 총독으로 권세와 부를 누렸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니 허무했을 것입니다. 그도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갖고 싶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여인과 살았고, 현 부인 드루실라는 세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도 야고보 사도를 살해한 헤롯 아그립바 1세(행12:2) 딸로서, 역시 벨릭스는 세 번째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벨릭스가 유혹하자 남편을 버렸습니다. 이런 그들 앞에서 바울은 무슨 말씀을 전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의를 얻지 못하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사는 사람에게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가르쳤습니다. 벨릭스는 불의하게 살았고,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판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회개와 신앙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이 벨릭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가라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함으로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그는 그 후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는 돈을 받을까 바라고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구제금을 갖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니 물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바울의 후원자들이 많다고 여겼는지 바울에게 돈을 주면 유리한 판결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돈에 대한 탐욕으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벨릭스와 같은 이가 참 많습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세상 물질욕, 출세욕, 명예욕,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는 마음, 쾌락의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울과 벨릭스의 삶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2년 동안 바울을 구류해 둔 이유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을 풀어주면 유대인들의 민심이 좋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유 없이 붙잡아 둔 것입니다. 그는 진리보다 인기를 택했습니다. 바울은 죄도 없으면서 2년동안 억울하게 구류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쉼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때로는 지루하고 평범합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지만 고발당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2년 동안 붙잡혀 지내야 했습니다. 2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회의가 들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내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기간을 잘 보내야 합니다. 바울에게 2년의 구류 기간을 통해서 로마에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는 감옥에서 27년간을 복역하면서도 운동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탔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자유를 향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기간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도중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임 총독인 베스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는 너희 중 유력자들이 나와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거기서 그를 고발하라고 말했습니다.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그가 나오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증거 없는 고발은 모함이요 무고입니다. 그들은 증거도 대지 못하면서 바울을 고발하고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해서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에 이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 행사였습니다. 이에 베스도는 가이사에게 곧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을 것을 결정합니다. 이로써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유도하여 해치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바울이 왜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을까요? 바울은 일찍이 세계의 수도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그는 로마 선교를 꿈꾸며 로마서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 공회에서 재판을 받던 그 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로마 선교를 꿈꾸었던 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롬1:13).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나아갈 좋은 길을 구했습니다(롬1:10).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로마 선교의 비전 가운데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고자 합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모양이 되더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유학생이면 어떠하고, 사업가면 어떠하고, 죄수의 몸이면 어떠하랴. 그에게는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살아났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런 삶의 중심에 구원의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 사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대 강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전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도왔습니다. 동시에 많은 핍박과 고난도 받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다 말씀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에 사랑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부활의 소망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질 때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4:1–25:12
요절 | 사도행전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소망은 환난 가운데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떤 소망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삶의 양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증언을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삶에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으면 먹고 마시는 삶, 쾌락적인 삶, 허무한 생각에 기초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내세를 믿는다면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로마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나의 소망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고소 내용이 무엇입니까?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를 칭찬하며 마음을 얻고자 입을 열었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벨릭스 입장에서는 듣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노예 출신으로서 잔혹하고 뇌물과 여색을 탐하는 자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소요 사태를 진압한 것은 사실이나 소요 진압 과정에서 강도떼들을 부추겨 약탈하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같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행적은 바울을 재판하는 과정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들의 고발 내용은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그들이 볼 때 기독교는 전염병과 같은 확산력이 있었습니다.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져나가듯이 복음은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나갔습니다. 기독교는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였고, 성전을 더럽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 유대인들 편에서는 크게 다루어져야 했지만, 총독에게 는 크게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총독이 볼 때 이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만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문제를 고발했고 유대인들도 이 말이 옳다고 거드니 그는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격에 그들의 주장을 격파하였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되지 않아 무슨 큰일을 저지를 기간이 짧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바울이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이나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바울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고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총독 앞에서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신의 결백함을 보이고자 함이고, 둘째로, 모함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드러내고자 함이며 셋째로, 총독에게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지도자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이단이 실상은 참된 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조상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은 조상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습니다. 그는 이상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똑같은 구약을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소망에 있어서도 종교지도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때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갈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21절에서는 이를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그 생명이 한계적인 사람, 내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죽어서 하나님을 전혀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죽어서 전혀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삶의 의욕과 열정이 죽은 사람도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살아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죽어 있던 사람인데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고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리라는 살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양심으로 살고자 힘썼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바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양심의 거리낌이 있어도 무시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경종을 울려도 무시하고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이 땅에서 잘 먹고 즐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기 위해 양심의 거리끼는 삶을 살지 않고자 힘쓰게 됩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삶이 현실의 삶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 그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그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였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바리새인들도 믿고 있던 교리라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고소를 당한 것은 잘못 때문이 아니라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판단을 연기하였습니다. 벨릭스는 어떻게 이 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요? 그가 유대 지역을 10년 정도 관할하다 보니 들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후에 바울을 불러 듣는 것을 볼 때 그 도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유대 여자였습니다. 아내의 영향으로 복음에 관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혹은 총독으로 권세와 부를 누렸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니 허무했을 것입니다. 그도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갖고 싶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여인과 살았고, 현 부인 드루실라는 세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도 야고보 사도를 살해한 헤롯 아그립바 1세(행12:2) 딸로서, 역시 벨릭스는 세 번째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벨릭스가 유혹하자 남편을 버렸습니다. 이런 그들 앞에서 바울은 무슨 말씀을 전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의를 얻지 못하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사는 사람에게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가르쳤습니다. 벨릭스는 불의하게 살았고,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판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회개와 신앙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이 벨릭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가라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함으로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그는 그 후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는 돈을 받을까 바라고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구제금을 갖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니 물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바울의 후원자들이 많다고 여겼는지 바울에게 돈을 주면 유리한 판결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돈에 대한 탐욕으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벨릭스와 같은 이가 참 많습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세상 물질욕, 출세욕, 명예욕,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는 마음, 쾌락의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울과 벨릭스의 삶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2년 동안 바울을 구류해 둔 이유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을 풀어주면 유대인들의 민심이 좋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유 없이 붙잡아 둔 것입니다. 그는 진리보다 인기를 택했습니다. 바울은 죄도 없으면서 2년동안 억울하게 구류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쉼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때로는 지루하고 평범합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지만 고발당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2년 동안 붙잡혀 지내야 했습니다. 2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회의가 들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내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기간을 잘 보내야 합니다. 바울에게 2년의 구류 기간을 통해서 로마에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는 감옥에서 27년간을 복역하면서도 운동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탔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자유를 향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기간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도중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임 총독인 베스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는 너희 중 유력자들이 나와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거기서 그를 고발하라고 말했습니다.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그가 나오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증거 없는 고발은 모함이요 무고입니다. 그들은 증거도 대지 못하면서 바울을 고발하고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해서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에 이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 행사였습니다. 이에 베스도는 가이사에게 곧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을 것을 결정합니다. 이로써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유도하여 해치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바울이 왜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을까요? 바울은 일찍이 세계의 수도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그는 로마 선교를 꿈꾸며 로마서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 공회에서 재판을 받던 그 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로마 선교를 꿈꾸었던 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롬1:13).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나아갈 좋은 길을 구했습니다(롬1:10).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로마 선교의 비전 가운데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고자 합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모양이 되더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유학생이면 어떠하고, 사업가면 어떠하고, 죄수의 몸이면 어떠하랴. 그에게는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살아났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런 삶의 중심에 구원의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 사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대 강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전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도왔습니다. 동시에 많은 핍박과 고난도 받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다 말씀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에 사랑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부활의 소망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질 때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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