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22강(22:30-23:35)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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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22 강
말씀 | 사도행전 22:30–23:35
요절 | 사도행전 23:11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바울을 사이에 두고 유대인들과 로마 군 천부장 사이에 일어나는 첩보전과 같은 긴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십 명이나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 맹세하고 길목마다 매복하여 그를 지키고 있었고, 로마 군인들은 바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호송하기 위해서 부대를 동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주연이고 그 생질이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아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연극이라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본을 짜셨고 섬세하게 감독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이를 힘써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가서 그 앞에 세웠습니다. 천부장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것은 바울의 사건이 정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적인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자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는 대제사장들, 서기관과 장로들이 참석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첫째, 바울의 공회 재판. 2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듣고 대제사장은 아니꼬왔습니다. 심문을 받으러 온 죄인인 주제에 너무 나선다고 생각을 했는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바울도 지지 않았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받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바울에게 그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알려 주자 사과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5).” 바울은 주도권을 가지고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죽은 자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다(고전15:2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죽은 자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소망할 때 바울은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때로는 기쁨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손해를 보더라도 의와 진리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으로 인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편에서 몇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겼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하였습니다.
둘째,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1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안토니오 요새에 감금되어 힘들었을 것입니다. 굶주린 이리떼처럼 바울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세력들 앞에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면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로마는 세계의 모든 길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전세계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며 그를 통해 전세계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라면 로마는 경제, 문화, 예술,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우리의 신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이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일생 힘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당시 로마는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로마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장).”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그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악해지면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가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의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파멸에서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의 세계로 들어오고 살아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누군가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역에 복음을 전하려면 담대해야 합니다. 쫄지도 말고 떨지도 말고 물러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바울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감옥 문을 여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드로아에서 복음 역사가 진전이 없었을 때에, 바울은 밤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는 약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께서는 밤에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18:9).”
우리가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순간순간 위기와 역경을 만납니다. 과연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 근심이 생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가 복음 역사를 움직이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앞서가시며 길을 닦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섬세하게 도와주시고 이끄십니다. 개척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용기와 담대함입니다. 여호수아 1:6절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지의 땅, 사명지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마다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이 이를 위해서 부르셨고, 인도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승리하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디서나 동행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국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선교지에서도 함께 하셔서 도우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사탄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어 이방 양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때마다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자기 훈련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하십니다.
복음 역사는 언제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취직하기가 어렵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업에서 서로 졸업생들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어를 공부하고 준비한다면 일본 캠퍼스 개척과 함께 직장 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길을 여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붙잡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대학생 제자 양성을 통해서 세계 선교를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신촌에서 로마는 홍익대 캠퍼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대 학생들이 변화되어 이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홍익대 캠퍼스에서부터 제자를 잘 키워 세계를 섬기는 센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을 죽음의 위협에서 보호하신 하나님. 날이 새어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정말 그들의 간계는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누가 이들의 간계를 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생질이 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질은 누나의 아들입니다. 바울의 누나도 바리새인에게 시집을 갔고 그 아들도 바리새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데리고 들어가니 그가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그가 유대인들이 공모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백부장들을 불러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시켰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장한 군인 470명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병력은 안토니아 요새 수비대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철저한 경비 속에 총독 벨릭스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이는 복음을 로마에 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사명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자원을 동원하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 편에서는 한 사람의 사명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명인이 그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이란 목숨을 내 놓고 완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보면 중세 유럽은 기독교 지배하는 대륙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치 샌드위치와 같아서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중세 유럽은 외양은 기독교 제국이었지만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삶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은 미신적이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기독교에 식상하게 되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유럽은 초대교회의 상황과 같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소수 종교가 되었고 대부분 무신론자요, 모슬렘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허바울 마리아 선교사님이 프랑스 파리에 파송되어 캠퍼스 제자 양성을 섬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사회에 강물과 같이 흘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부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편지하였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헤롯 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행9:15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 마침내 세우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동안의 과정은 바울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간계를 쓰시고, 로마 천부장의 두려움도 쓰셔서 마침내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닥친 위기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눅12:32절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은 무리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세상 문화의 세력은 거대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적어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능히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지원하십니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그 자원들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오직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캠퍼스 개척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이 나라의 심장과 같은 캠퍼스에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 증언하는 일을 담대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2:30–23:35
요절 | 사도행전 23:11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바울을 사이에 두고 유대인들과 로마 군 천부장 사이에 일어나는 첩보전과 같은 긴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십 명이나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 맹세하고 길목마다 매복하여 그를 지키고 있었고, 로마 군인들은 바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호송하기 위해서 부대를 동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주연이고 그 생질이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아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연극이라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본을 짜셨고 섬세하게 감독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이를 힘써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가서 그 앞에 세웠습니다. 천부장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것은 바울의 사건이 정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적인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자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는 대제사장들, 서기관과 장로들이 참석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첫째, 바울의 공회 재판. 2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듣고 대제사장은 아니꼬왔습니다. 심문을 받으러 온 죄인인 주제에 너무 나선다고 생각을 했는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바울도 지지 않았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받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바울에게 그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알려 주자 사과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5).” 바울은 주도권을 가지고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죽은 자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다(고전15:2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죽은 자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소망할 때 바울은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때로는 기쁨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손해를 보더라도 의와 진리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으로 인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편에서 몇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겼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하였습니다.
둘째,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1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안토니오 요새에 감금되어 힘들었을 것입니다. 굶주린 이리떼처럼 바울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세력들 앞에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면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로마는 세계의 모든 길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전세계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며 그를 통해 전세계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라면 로마는 경제, 문화, 예술,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우리의 신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이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일생 힘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당시 로마는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로마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장).”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그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악해지면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가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의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파멸에서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의 세계로 들어오고 살아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누군가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역에 복음을 전하려면 담대해야 합니다. 쫄지도 말고 떨지도 말고 물러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바울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감옥 문을 여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드로아에서 복음 역사가 진전이 없었을 때에, 바울은 밤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는 약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께서는 밤에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18:9).”
우리가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순간순간 위기와 역경을 만납니다. 과연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 근심이 생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가 복음 역사를 움직이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앞서가시며 길을 닦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섬세하게 도와주시고 이끄십니다. 개척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용기와 담대함입니다. 여호수아 1:6절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지의 땅, 사명지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마다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이 이를 위해서 부르셨고, 인도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승리하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디서나 동행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국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선교지에서도 함께 하셔서 도우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사탄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어 이방 양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때마다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자기 훈련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하십니다.
복음 역사는 언제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취직하기가 어렵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업에서 서로 졸업생들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어를 공부하고 준비한다면 일본 캠퍼스 개척과 함께 직장 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길을 여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붙잡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대학생 제자 양성을 통해서 세계 선교를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신촌에서 로마는 홍익대 캠퍼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대 학생들이 변화되어 이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홍익대 캠퍼스에서부터 제자를 잘 키워 세계를 섬기는 센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을 죽음의 위협에서 보호하신 하나님. 날이 새어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정말 그들의 간계는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누가 이들의 간계를 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생질이 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질은 누나의 아들입니다. 바울의 누나도 바리새인에게 시집을 갔고 그 아들도 바리새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데리고 들어가니 그가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그가 유대인들이 공모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백부장들을 불러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시켰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장한 군인 470명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병력은 안토니아 요새 수비대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철저한 경비 속에 총독 벨릭스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이는 복음을 로마에 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사명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자원을 동원하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 편에서는 한 사람의 사명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명인이 그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이란 목숨을 내 놓고 완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보면 중세 유럽은 기독교 지배하는 대륙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치 샌드위치와 같아서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중세 유럽은 외양은 기독교 제국이었지만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삶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은 미신적이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기독교에 식상하게 되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유럽은 초대교회의 상황과 같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소수 종교가 되었고 대부분 무신론자요, 모슬렘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허바울 마리아 선교사님이 프랑스 파리에 파송되어 캠퍼스 제자 양성을 섬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사회에 강물과 같이 흘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부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편지하였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헤롯 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행9:15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 마침내 세우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동안의 과정은 바울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간계를 쓰시고, 로마 천부장의 두려움도 쓰셔서 마침내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닥친 위기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눅12:32절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은 무리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세상 문화의 세력은 거대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적어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능히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지원하십니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그 자원들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오직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캠퍼스 개척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이 나라의 심장과 같은 캠퍼스에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 증언하는 일을 담대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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