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 21강(22:1-29)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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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21강
말씀 | 사도행전 22:1-29
요절 | 사도행전 22:21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바울의 간증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핍박자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 후에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일생 질문하며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님, 누구시니이까?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여기서 변명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외부의 비난이나 공격에 대해서 말로 자신을 변호하고 항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부형들아’라고 부르는 호칭 속에 그 사랑과 심정이 녹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생각했고 동족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친교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원수처럼 여겨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바울은 아버지,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변화되었지만 가족과 친족, 민족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바울이 모국어인 히브리 말로 “부형들아!”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모두가 인정하는 스승이었습니다. 바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23:6) 율법의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열심히 지켰습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강조하여 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율법을 모른다거나 율법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율법을 거스른다고 비난하는 주장들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율법을 정통으로 배워 잘 알고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었음을 말함으로서 그들과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그의 증인입니다. 또 그들에게서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갔습니다. 과거의 바울은 지금 바울을 공격하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되 큰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큰 빛을 예수님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시니이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이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던 그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해 오던 일들이 다 뻥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자신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부활을 증언하는 성도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거짓 선지자나 이단의 교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거짓 선지자에 미혹된 어리석고 악한 집단이 아니라 참된 증인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실제로 경험해야 확실히 안다는 뜻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계신 것과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말씀을 듣자 심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깊이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고꾸라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자기 발견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핍박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발견을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거짓된 자기가 깨어지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니 흉악한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이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 우월감, 열등감, 불신과 교만, 이전에는 죄가 아니고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던 것도 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죄사함을 간구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 하나님이 귀여워하시는 존재로서 자기 발견이 될 때 참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동시에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생길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찾게 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클수록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됩니다.
둘째,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사울은 주님께 항복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제까지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요 그를 슬프시게 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는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실 이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왜 존재하는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서 대충 그러려니 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자기 판단, 자기 결정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는 자기 판단과 결정으로 자기 할 일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바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던 바울에게 이런 현상은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가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주도적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는 이런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성령의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자기 판단이나 결정이 아니라 성령의 판단과 결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와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울아 다시 보라.” 그러자 즉시 그의 눈꺼풀이 벗겨지며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가 자신과 다른 사람과 만물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그가 조상들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신을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만민을 의롭게 하고자 하시는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의인 곧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복음 진리를 바울이 먼저 깊이 깨닫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했고 그런 이단의 괴수와 그 추종자들을 박멸하는 것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을 내어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하나님은 그를 특별하게 택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사실을 증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자기 같은 무지한 열심을 가졌던 핍박자를 택하사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셨는지 그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데 모든 것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사명까지 영접했을 때 아나니아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16).” 바울은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음으로 죄 씻음의 외적인 표시를 받은 후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을 받은 후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3년을 거하면서 복음 진리를 깊이 깨닫고 다메섹에 갔다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보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자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겠지만 자신을 생각해 볼 때 그냥 나갈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 또한 이것이 주님과 교회를 박해한 자신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주님을 향한 바울의 진심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고 더 멀리는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곳을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높고 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을 고집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명령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자기 계획과 뜻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이 때 고향 다소로 가서 약 10년 간 이방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바나바가 그를 초빙해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여기서 3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이방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증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듣지 않으니 더 이상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매일 또는 중요한 순간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람을 죽이고 핍박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물은 이후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 진리를 전하여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세웠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 개척 역사에 쓰임 받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예루살렘이 먼저였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두신 뜻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교사로 나아가는 것이 자기 소원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남아서 제자양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가라고 보내신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의 말 중 어떤 대목이 그들을 자극한 것일까요? 바로 앞에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방인들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이방인들을 유대교 신자로 만들려고 바다를 건너기까지 찾아다니며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도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단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었는데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성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것이 없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온 세상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입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며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편협한 유다이즘으로 인해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제사장 나라로 쓰시려고 먼저 부르신 것이지, 유대인들만 구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닌데 그들은 유대인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교만, 편협한 민족주의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무슨 일로 그들이 떠드는지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을 가죽줄로 매고 채찍질하며 심문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어찌하려느냐, 그가 로마 시민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놀랜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또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채찍질을 당하기 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돌에도 맞고 수많은 위협을 겪은 바울 아닙니까? 만약 이 순간 채찍에 맞고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면서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사용해서 복음 전할 기회를 확장했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신분, 지위, 재물, 권리 등 세상에서 자기가 가진 것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로마시민으로서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온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나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시고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부르심을 따라 가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한국과 전 세계 캠퍼스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죽을 때까지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2:1-29
요절 | 사도행전 22:21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바울의 간증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핍박자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 후에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일생 질문하며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님, 누구시니이까?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여기서 변명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외부의 비난이나 공격에 대해서 말로 자신을 변호하고 항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부형들아’라고 부르는 호칭 속에 그 사랑과 심정이 녹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생각했고 동족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친교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원수처럼 여겨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바울은 아버지,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변화되었지만 가족과 친족, 민족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바울이 모국어인 히브리 말로 “부형들아!”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모두가 인정하는 스승이었습니다. 바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23:6) 율법의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열심히 지켰습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강조하여 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율법을 모른다거나 율법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율법을 거스른다고 비난하는 주장들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율법을 정통으로 배워 잘 알고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었음을 말함으로서 그들과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그의 증인입니다. 또 그들에게서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갔습니다. 과거의 바울은 지금 바울을 공격하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되 큰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큰 빛을 예수님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시니이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이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던 그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해 오던 일들이 다 뻥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자신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부활을 증언하는 성도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거짓 선지자나 이단의 교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거짓 선지자에 미혹된 어리석고 악한 집단이 아니라 참된 증인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실제로 경험해야 확실히 안다는 뜻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계신 것과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말씀을 듣자 심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깊이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고꾸라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자기 발견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핍박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발견을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거짓된 자기가 깨어지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니 흉악한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이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 우월감, 열등감, 불신과 교만, 이전에는 죄가 아니고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던 것도 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죄사함을 간구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 하나님이 귀여워하시는 존재로서 자기 발견이 될 때 참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동시에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생길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찾게 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클수록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됩니다.
둘째,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사울은 주님께 항복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제까지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요 그를 슬프시게 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는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실 이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왜 존재하는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서 대충 그러려니 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자기 판단, 자기 결정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는 자기 판단과 결정으로 자기 할 일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바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던 바울에게 이런 현상은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가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주도적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는 이런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성령의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자기 판단이나 결정이 아니라 성령의 판단과 결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와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울아 다시 보라.” 그러자 즉시 그의 눈꺼풀이 벗겨지며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가 자신과 다른 사람과 만물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그가 조상들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신을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만민을 의롭게 하고자 하시는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의인 곧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복음 진리를 바울이 먼저 깊이 깨닫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했고 그런 이단의 괴수와 그 추종자들을 박멸하는 것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을 내어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하나님은 그를 특별하게 택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사실을 증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자기 같은 무지한 열심을 가졌던 핍박자를 택하사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셨는지 그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데 모든 것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사명까지 영접했을 때 아나니아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16).” 바울은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음으로 죄 씻음의 외적인 표시를 받은 후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을 받은 후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3년을 거하면서 복음 진리를 깊이 깨닫고 다메섹에 갔다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보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자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지 않겠지만 자신을 생각해 볼 때 그냥 나갈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 또한 이것이 주님과 교회를 박해한 자신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주님을 향한 바울의 진심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고 더 멀리는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곳을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높고 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을 고집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명령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자기 계획과 뜻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이 때 고향 다소로 가서 약 10년 간 이방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바나바가 그를 초빙해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여기서 3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이방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증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듣지 않으니 더 이상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매일 또는 중요한 순간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람을 죽이고 핍박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물은 이후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 진리를 전하여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세웠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 개척 역사에 쓰임 받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예루살렘이 먼저였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두신 뜻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교사로 나아가는 것이 자기 소원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남아서 제자양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가라고 보내신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의 말 중 어떤 대목이 그들을 자극한 것일까요? 바로 앞에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방인들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이방인들을 유대교 신자로 만들려고 바다를 건너기까지 찾아다니며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도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단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었는데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성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것이 없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온 세상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입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며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편협한 유다이즘으로 인해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제사장 나라로 쓰시려고 먼저 부르신 것이지, 유대인들만 구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닌데 그들은 유대인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교만, 편협한 민족주의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무슨 일로 그들이 떠드는지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을 가죽줄로 매고 채찍질하며 심문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어찌하려느냐, 그가 로마 시민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놀랜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또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채찍질을 당하기 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돌에도 맞고 수많은 위협을 겪은 바울 아닙니까? 만약 이 순간 채찍에 맞고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면서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사용해서 복음 전할 기회를 확장했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신분, 지위, 재물, 권리 등 세상에서 자기가 가진 것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로마시민으로서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온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나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시고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부르심을 따라 가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한국과 전 세계 캠퍼스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죽을 때까지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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