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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6년 행 20강(21:1-40)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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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3회 작성일 16-09-04 13:37

본문

2016년 사도행전 제 20 강
말씀 | 사도행전 21:1–40
요절 | 사도행전 21:13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예루살렘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자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난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자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도의 교제는 아름답습니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상륙했을 때 그곳의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두로는 그가 개척한 곳이 아니지만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사귐을 가진 후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성령 안에서 사랑하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바울 일행이 떠나갈 때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하였습니다. 그들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는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습니다. 빌립은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 재정 담당자였고 박해로 흩어졌을 때 사마리아 선교를 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역사가 있을 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 후로 가이사랴에 와서도 20년 이상 변함없이 전도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네 딸은 결혼도 안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복음의 증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고난의 길을 가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시대를 살면서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때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힘이 되고 위로를 받습니다. 믿음의 친구들과 사귐을 갖고 서로 격려할 때 고난 가운데서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혼자 있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 서로 격려하며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빌립의 네 딸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환난에 대해서 예언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예언의 은사가 있었지만 주의 종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들의 성숙한 인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 날 머물렀는데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예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기근이 왔고 바울은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검증을 받은 아가보의 예언을 입체적으로 보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고난을 받을 것은 확실하였습니다. 성령께서도 이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은 울면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제자들이 막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겪어온 길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 땅에서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방 지역과 달리 골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당할 고난이 얼마나 심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곡하게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그들의 눈물의 만류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의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즉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거룩한 부담이 그로 하여금 결박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감내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고난 너머에 영광이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죽음은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슬프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죽음까지도 감당할 준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런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신앙이 뜨거울 때는 기꺼이 고난을 사랑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서 어려운 곳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을 받고 나서 초심을 잃어버리면 좀 평안한 가운데 지내고 싶습니다. 축복을 받고 더욱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성숙한 모습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때로 고난은 예수님을 배우는 통로가 됩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고난을 능히 감당할 은혜와 힘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큰 만큼 하나님의 위로도 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이런 고난을 받음으로 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스러운 상흔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굳은 각오로 고난을 받고자 했을 때 그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무시와 욕설, 때로는 감옥에 가는 분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서 질병을 얻고 그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당하는 문화 충격과 물질 자립, 자녀 교육, 제자 양성, 주일 메시지, 언어 정복 등 4중 5중의 십자가로 인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낯 설고 물 설은 이방 땅에서 사는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심과 주님의 도우심을 더 생생히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난에 따르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깊이가 있고 겸손하며 온유해집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자녀들이 이런 고난 가운데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훌륭한 영적 리더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현지인 제자 양성을 이루어 열매 맺는 기쁨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도 많은 고난을 당하는데 주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의미가 있고 위장된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쉽고 편한 길만 따라가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약해집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넓은 길은 가기가 편하고 많은 사람이 그리로 가지만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고난이 없이 쉽고 편안한 생활만 계속되면 그 삶이 황폐하게 됩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만 계속 비취면 그 땅은 사막으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명은 고난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을 통해서 발전해왔습니다. 미국의 남부는 비옥한 땅과 평야가 있지만 북부는 춥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북부가 더 잘 살고 풍요로우며 미국 문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대기로 감싸듯이 모든 것을 오냐오냐하며 키우면 이기적이고 버릇 없는 아이가 됩니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양육할 때 겸손하고 남에 대한 배려가 있고 성숙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과잉보호로 인해서 아이들을 병약하게 키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차원 높은 사랑은 훈련하는 사랑입니다. 사랑과 지식으로 사람을 키우라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복음화와 제자 양성에 따르는 고난이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제자를 세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이 겪은 심각한 핍박은 없습니다. 하지만 캠퍼스에서 전도할 때 잡상인이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양들의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아픔과 상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나를 기다리는 것이 고난과 아픔이라는 것을 알면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 도처에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고자 할 때 직장에서 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전공을 공부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마다 쉽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시대에 절제하고 검소한 삶을 택하고 고난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익힐 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인생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 목적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은 목적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은 눅 19: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 10:10b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또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감격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단순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야고보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장로들도 다 있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이는 바울의 이방인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복음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한 악감을 품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바울이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자인 줄 알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유 했지만 복음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유대인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고전9:19,20). 이방인에게는 율법 전통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유대인을 위해서는 율법 전통을 지켰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 같이 행한 것입니다(26). 바울의 목표는 어찌하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복음 외에는 무엇이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일주일의 결례기간이 끝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며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붙잡게 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인 드로비모가 성내에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바울이 전한 ‘은혜의 말씀’을 그들이 생명처럼 여긴 율법과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적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 없이 오해에 기초해 바울을 성전모독죄로 고발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스마트 폰도 없던 시대에 이렇게 빨리 보고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었습니다.

  군사들에게 들려 영내로 들어가려 할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바울의 정확한 억양의 헬라어를 듣고 천부장은 그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방금 사나운 무리들의 폭력으로 죽을 뻔 했는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목자의 심정을 품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대해 무지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이는 데 동참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빛으로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가야 하는 믿음의 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의 길을 꿋꿋하게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기를 결심하고, 나를 부르신 부르심을 따라 사명인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여 복음을 전해 주는 작은 예수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를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선택하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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