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18강(19:1-41)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날마다 강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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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18 강
말씀 | 사도행전 19:1-41
요절 | 사도행전 19:9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날마다 강론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 사역은 선교의 꽃이라 불릴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을 따로 불러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자가 없다고 할 만큼 편만하게 복음으로 채웠습니다. 그 사회에 끼친 영향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 사역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로마 선교를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이 시간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공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배우고 우리도 제자 양성에서 열매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왔습니다. 거기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예수님을 믿고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례 요한이 증거한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부모님이나 친구를 따라서 교회 생활을 하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해서 이성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던지 윤리도덕적인 생활수준에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자기 발견이 없고 그저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기 의에 기초해서 선행을 힘쓰는 수준입니다.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합니다. 마음에 성령의 불이 붙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심판의 하나님은 믿지만 아직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주되심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가 없었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미숙한 제자들을 도와주는 바울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겉으로는 신자인 것 같으나 실제 그 신앙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어떤 점에서 나의 구주이신지,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나도 교회에 나간다, 나도 알만큼 안다는 태도를 보일 때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도록,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그 은혜 안에 신앙 생활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지만 나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역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 역사하사 우리 공동체 가운데 자녀들이, 새 양들이 거듭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을 반복적으로 주기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들에게 성령의 불을 허락해 주시고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 대개 3개월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면 가치관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됩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또 그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이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변화된 몸으로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십니다. 그 나라에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계21:4).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고 소망함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에 대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격렬하게 비방함으로 더 이상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 즉 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분위기가 회당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학구적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방하는 자들과 논쟁하며 다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역사에는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있는 반면,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쏟다보면 정작 말씀을 잘 듣고 성장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구신자를 돕는 것은 새신자를 돕는 것보다 네 배의 힘이 든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여기서 강론했다는 단어는 NIV 영어 성경에서는 had discussions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는 문답식으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대화식으로 깊이 있게 내면문제를 터치하며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회당에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인 말씀 공부가 이루어졌고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말씀을 풀어 전하였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보다 자기가 말을 하면서 동참할 때 더 깊이 있고 즐겁게 말씀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동안 처음에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섬기시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돕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에베소 복음역사의 기초는 바로 이처럼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날마다 말씀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어떤 톡톡 튀는 프로그램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교제나 음식으로 섬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단순하게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숨은 죄를 드러내고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지 창조를 이루셨고 지금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재창조를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힘든 복음역사 환경 가운데서 전도를 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완고하고 비방하는 양들을 섬기느라 마음 고생을 하고 상처받고 낙심합니다. 물론 완악한 양들을 전도하고자 애쓰는 여러 모양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마음 밭이 좋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양회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처럼 단기간이라도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되 어느 정도였습니까? 두란노서원에서 바울은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몇 사본들에 의하면 바울은 오전11시부터 오후4시까지 강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은 당시 오후 휴식 시간에 해당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말씀을 가르쳤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했습니다. 20:34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손으로 자신과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절에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에베소에서도 그렇게 밤낮으로 일하면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단지 말씀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20:31절을 보면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면서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문제를 상담하고 때로는 회개하도록 돕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눈물을 흘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도우며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더라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밤낮으로 일하면서 2년 이상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은 놀라운 열정입니다. 바울은 말씀이 충만했고 사랑과 인내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을 때 제자들 안에 놀라운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술을 행하던 것을 회개하고, 아데미 신상 숭배가 없어졌습니다. 훼이스 북에 마음을 쏟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형식적인 말씀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예리하고 깊이 있는 진리의 말씀에 심령이 찔리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회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멀리만 느껴지던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생한 말씀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공부할수록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다 아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꼭 맞는 해결책을 말씀을 공부하면서 발견하였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고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니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할 때 행동할 이유가 생기고 동기부여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얻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자 하는 첫 사랑을 회복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기를 두해 동안이나 계속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성장한 제자들이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말씀공부에 초청해 데려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키우는 가운데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이 집중적인 에베소 제자양성 역사를 통해 세워졌습니다. 또한 이처럼 날마다 성경을 강론하는 바울의 손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처럼 놀라운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마귀의 역사도 있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였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망신만 당하였습니다. 즉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렸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보니 ‘마술의 바다에 빠져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술’, ‘마술 따라잡기’, ‘how마술’ 등등 당시 베스트셀러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아 놓은 책을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은 오만은 원화로 계산하면 오십억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에베소 사역의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제자들도 말씀에 붙잡혀 삶이 변화되고 말씀을 증거하는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대일 말씀 공부에 불이 붙어 한 주에 12팀, 30팀 일대일 공부하는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미신적인 것을 믿고 사주를 보고 점쟁이를 찾아가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취직 걱정하며 불안하던 학생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은혜 받은 학생들이 과친구들에게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서 공대, 미대, 사범대, 경영대가 변화되고 제자들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 유학을 하고 거기서 또 제자를 세우는 가운데 세계 각 나라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에는 마게도냐에서 연보를 모아 당시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함이었습니다(롬15:25,26). 그 후에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놀라운 말씀의 역사를 경험한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성공한 목자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나이도 60이 가까웠습니다. 이제 인생을 정리하며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회고록이나 쓰면서 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를 통해서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죄와 우상의 세력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힘을 얻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돕는 학생 양들 안에 구원의 기쁨이 임하고 성장하여 또 다른 제자를 세우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9:1-41
요절 | 사도행전 19:9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날마다 강론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 사역은 선교의 꽃이라 불릴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을 따로 불러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자가 없다고 할 만큼 편만하게 복음으로 채웠습니다. 그 사회에 끼친 영향도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 사역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로마 선교를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이 시간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공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배우고 우리도 제자 양성에서 열매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왔습니다. 거기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예수님을 믿고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례 요한이 증거한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부모님이나 친구를 따라서 교회 생활을 하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해서 이성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던지 윤리도덕적인 생활수준에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자기 발견이 없고 그저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기 의에 기초해서 선행을 힘쓰는 수준입니다.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합니다. 마음에 성령의 불이 붙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심판의 하나님은 믿지만 아직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주되심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가 없었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미숙한 제자들을 도와주는 바울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겉으로는 신자인 것 같으나 실제 그 신앙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어떤 점에서 나의 구주이신지,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나도 교회에 나간다, 나도 알만큼 안다는 태도를 보일 때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도록,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그 은혜 안에 신앙 생활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지만 나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역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 역사하사 우리 공동체 가운데 자녀들이, 새 양들이 거듭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을 반복적으로 주기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들에게 성령의 불을 허락해 주시고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 대개 3개월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면 가치관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됩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또 그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이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변화된 몸으로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십니다. 그 나라에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계21:4).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고 소망함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에 대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격렬하게 비방함으로 더 이상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 즉 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분위기가 회당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학구적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방하는 자들과 논쟁하며 다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역사에는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있는 반면,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쏟다보면 정작 말씀을 잘 듣고 성장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구신자를 돕는 것은 새신자를 돕는 것보다 네 배의 힘이 든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여기서 강론했다는 단어는 NIV 영어 성경에서는 had discussions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는 문답식으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대화식으로 깊이 있게 내면문제를 터치하며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회당에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인 말씀 공부가 이루어졌고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말씀을 풀어 전하였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보다 자기가 말을 하면서 동참할 때 더 깊이 있고 즐겁게 말씀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동안 처음에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섬기시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돕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에베소 복음역사의 기초는 바로 이처럼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날마다 말씀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어떤 톡톡 튀는 프로그램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교제나 음식으로 섬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단순하게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숨은 죄를 드러내고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지 창조를 이루셨고 지금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재창조를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힘든 복음역사 환경 가운데서 전도를 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완고하고 비방하는 양들을 섬기느라 마음 고생을 하고 상처받고 낙심합니다. 물론 완악한 양들을 전도하고자 애쓰는 여러 모양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마음 밭이 좋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양회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처럼 단기간이라도 집중적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되 어느 정도였습니까? 두란노서원에서 바울은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몇 사본들에 의하면 바울은 오전11시부터 오후4시까지 강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은 당시 오후 휴식 시간에 해당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말씀을 가르쳤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했습니다. 20:34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손으로 자신과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절에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에베소에서도 그렇게 밤낮으로 일하면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단지 말씀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20:31절을 보면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면서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문제를 상담하고 때로는 회개하도록 돕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눈물을 흘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도우며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더라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밤낮으로 일하면서 2년 이상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은 놀라운 열정입니다. 바울은 말씀이 충만했고 사랑과 인내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을 때 제자들 안에 놀라운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술을 행하던 것을 회개하고, 아데미 신상 숭배가 없어졌습니다. 훼이스 북에 마음을 쏟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형식적인 말씀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예리하고 깊이 있는 진리의 말씀에 심령이 찔리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회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멀리만 느껴지던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생한 말씀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공부할수록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다 아시는 것 같고 나의 문제에 꼭 맞는 해결책을 말씀을 공부하면서 발견하였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고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니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할 때 행동할 이유가 생기고 동기부여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얻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자 하는 첫 사랑을 회복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기를 두해 동안이나 계속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성장한 제자들이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말씀공부에 초청해 데려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키우는 가운데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이 집중적인 에베소 제자양성 역사를 통해 세워졌습니다. 또한 이처럼 날마다 성경을 강론하는 바울의 손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처럼 놀라운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마귀의 역사도 있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였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망신만 당하였습니다. 즉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렸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보니 ‘마술의 바다에 빠져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술’, ‘마술 따라잡기’, ‘how마술’ 등등 당시 베스트셀러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아 놓은 책을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은 오만은 원화로 계산하면 오십억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에베소 사역의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제자들도 말씀에 붙잡혀 삶이 변화되고 말씀을 증거하는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대일 말씀 공부에 불이 붙어 한 주에 12팀, 30팀 일대일 공부하는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미신적인 것을 믿고 사주를 보고 점쟁이를 찾아가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취직 걱정하며 불안하던 학생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은혜 받은 학생들이 과친구들에게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서 공대, 미대, 사범대, 경영대가 변화되고 제자들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 유학을 하고 거기서 또 제자를 세우는 가운데 세계 각 나라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에는 마게도냐에서 연보를 모아 당시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함이었습니다(롬15:25,26). 그 후에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놀라운 말씀의 역사를 경험한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성공한 목자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나이도 60이 가까웠습니다. 이제 인생을 정리하며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회고록이나 쓰면서 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를 통해서 땅 끝이라고 하는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죄와 우상의 세력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힘을 얻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돕는 학생 양들 안에 구원의 기쁨이 임하고 성장하여 또 다른 제자를 세우는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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