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17년 눅20강(11:33-54)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9회 작성일 17-07-10 06:27

본문

2017년 누가복음 제 20 강
말씀 | 누가복음 11:33-54
요절 | 누가복음 11:35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지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그 세대가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들에게 보일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지난 주에는 도마의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요한 선교사님을 통해서 오뎃사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오늘 나눌 등불에 대한 비유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에게 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과 무관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빛과 표적과 심판은 동일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21절은 말씀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있는 빛이 우리에게 비추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생명을 얻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을 따라 올바른 길을 안내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등불 비유(33-36). 3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등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예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들어오는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비추어 안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삶을 밝게 비추려고 주신 선물입니다. 말씀을 잘 받고 순종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이 있고 그 얼굴이 빛날 뿐만 아니라 삶도 지혜롭게 행하여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반대로 등불을 움 속에나 말 아래 두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빛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표적을 빛으로 여기며 계속해서 기적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회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불신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어 늘 헤매게 됩니다. 열심히 일을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몸의 등불은 눈이라 제대로 보면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그 몸도 어둡습니다. 즉 빛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눈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밭이 문제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무엇을 듣는가,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눈이 성하다는 것은 관점이 바르다, 온전하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견을 가지고 보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이번에 금요일마다 있었던 “우뇌로 그리기”에 참석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내가 사물을 보고,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하는데 안다고 생각하고 그리면 다른 표현이 나오고, 내가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실체보다 공백을 보고 그리기, 실체보다 명암에 주의해서 그리기, 집중해서 보기 등등,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리면 제대로 그려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확신, 내가 보고 있다는 확신이 엉뚱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우뇌로, 있는 그대로 보기를 힘써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 이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8:18a)”는 결론과 맥락이 같습니다. 올바르게 보는 일과 올바르게 듣는 일은 마찬가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의 등불의 빛을 받아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크고 요나보다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크심을 알수록 내 속에 있는 빛이 밝아집니다. 36절은 33-35절을 풀이한 것인데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 예수님이 비추인 빛이 온전히 비추어짐으로써 영적으로 바른 길을 걸을 수 있고 남들에게도 빛을 비출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조금의 어둠도 없는, 완전히 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정한 축복은 우리 내면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 쌓아 놓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성공하여 좋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복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11:27,28).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내가 누군지 밝히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성공, 재물,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에서 감사하면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 안에 그의 빛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화 있을진저(37-54).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청했습니다. 대개 식사 초대를 받으면 덕담을 건네면서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나 예수님이 그 잔치에 응한 것이나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손을 씻는 의식은 정결예식으로서 물 주전자를 취해서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물을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사실 손을 씻는 것은 중요합니다. 손을 씻으면 위생상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청결해지고 분별력이 생기고 확신있게 무엇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논점은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결의식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그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손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마음이 강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지적하십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겉뿐만 아니라 속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잔과 대접의 겉의 ‘깨끗함’과 그들 속의 ‘더러움’을 대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고 악독은 사람에 대한 미움 같은 악입니다. 겉은 씻으면서 속을 씻지 않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겉뿐만 아니라 속도 깨끗하게 씻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겉만 보았습니다.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릇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정결과 구제는 거룩에 이르는 양 날개입니다. 선행 자체가 사람의 악을 씻는 ‘의’가 되지 않지만, 약자를 돌보는 헌신과 희생의 삶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자비가 흐를 때 속에 있는 탐심과 악독이 씻겨 속이 깨끗해집니다. 구제는 외적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다른 사람을 돌보고 굶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6에서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갈취한 음식들이 잔이나 접시에 담겨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들 안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회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 깨끗하게 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연약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이 참된 구제입니다. 남을 사랑하여 내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때 모든 것이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작심하고 책망을 계속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은 과일과 농작물의 십일조를 명하지만(레27:30; 신14:22) 박하와 운향 같은 향료나 채소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온갖 것들의 십일조를 계산하여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버렸습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십일조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십일조 신앙의 정신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해 드리면서 공의와 사랑을 버린다면 내용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다면 어려운대로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먹고 마실 것이 있음에도 탐욕으로 인해서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뿐 아니라 마음도 드려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로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투 스트레이트를 계속해서 날리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 명예와 사회적인 명예를 함께 누리는 위선 덩어리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토라를 보관하는 장소에 가장 가까운 앞자리로 회중을 마주 보는 자리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대개 학식 높은 사람이 받는 영예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 연구를 많이 한 사람들인데 그들의 기쁨이 사람들에게 인정과 높임을 받는데 있다면 공부를 많이 한 목적이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높이는 성공과 출세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나 학위를 높임 받는데 이용하려는 사람은 불행한 지도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섬기고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를 본받아서 자신을 낮추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 곁에 가서 그들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음으로 얻는 기쁨보다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은 녹아웃(Knockout) 될 때까지 강도를 더해갑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었지만 서민들은 평토장을 했습니다. 평토장은 봉분이 없어 눈에 잘 안 띄므로 회칠을 하여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지중에 밟아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정결 의식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부패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부정하다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부지중에 사람을 더럽히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존재였습니다. 성직자들이 종교 의식만 행하고 속을 씻지 않을 때 세상을 오염시키는 불행과 비극의 근원이 됩니다. 성직자들의 죄는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더 고약한 냄새를 피웁니다. 성직자와 신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 말씀의 빛으로 자기 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까? 왜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까? 말씀으로 자기 속을 살피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평토장한 무덤으로 전락해 나를 만나는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오염과 저주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하신 말씀은 미움에서 나온 저주가 아닙니다. 그들의 불행에 대한 연민의 탄식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놓쳐 심판 받게 될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들으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나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생활을 힘쓰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자 한 율법교사가 따졌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그 율법교사는 자신들은 바리새인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직업이고 바리새인은 종교 분파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대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같은 부류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대답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잘 지키도록 세분화하였지만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짐이었습니다. 그들은 짐을 져야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않고 판단만 했습니다. 자기들은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짐을 많이 지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잘 섬겨야 합니다. 짐이 많아지고 감당하다가 진이 빠지면 넘어져서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짐을 지웠으면 짐을 잘 지도록 돕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사모님들, 자매님들이 어린 양들을 양육하는 수고를 섬세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자로서 방향만 주고 좋은 결과만 기대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짐을 잘 지도록 돕는 일에 소홀히 했음을 회개합니다. 목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하도록 돕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조상들의 죄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말씀하십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그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 후손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더 이상 예언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49-51).”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님일 수도 있고, 하나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낸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창세 이후로부터 예수님까지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은 AD 70년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율법 교사들에 대한 세 번째 저주는 무엇입니까?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지식의 열쇠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막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훼방하였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함이 자라게 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자라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식의 열쇠로 천국의 문을 활짝 열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나 혼자서 말씀의 보화를 간직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그 안에서 보화를 찾아 하나님을 아는 생명의 지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나라 열쇠를 가진 특권과 축복을 받은 사람인데 성경 연구하여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으면 특권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었습니다(53). 그들은 율법을 복음의 틀에서 완성하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증오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지만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 대신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빛을 받아 내 안에 등불이 켜지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빛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빛이 점점 밝아져 세상을 비추며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선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29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