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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8 막26강(14:27-72)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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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18-09-0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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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26 강
말씀 | 마가복음 14:27-72
요절 | 마가복음 14:36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 마가복음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과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잘 아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며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자기 확신이 강했고 자기의 충성심과 의지를 신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았고 그 시간에 졸며 잠을 잤습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기도와 베드로의 기도하지 않음을 비교하며 그 결과를 통해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다(27-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다 그를 버릴 것입니다. 갸롯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제자들이 다 그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 예수님을 치리니 양들이 흩어질 것입니다. 양들이 흩어져 방황하고 상처를 받고 더러는 이리의 밥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실패는 예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체질을 아는 분이십니다. 그는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예외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를 아셨고 그들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살아난 후에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할 제자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마땅합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께 어떻게 해야 좋은지 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양은 양입니다. 양은 연약할 뿐만 아니라 멀리 보지 못합니다. 양은 제 갈 길로 갑니다. 베드로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자기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는 우월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못미더워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물과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나인데 어찌 주님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이 가상하지만 무섭게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정도 되면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주님 도와주세요. 어찌해야 합니까?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정이 상했는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힘있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주제파악을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잘 치고, 광내기를 좋아하고 인정받는 것을 즐깁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주님, 저는 먼지입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갈대와 같습니다. 변덕이 심하고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시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주십시오. 겸손의 영을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둘째,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32-42). 예수님은 평소 기도하시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감람산 근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얕으막한 산기슭 정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세 제자에게 자기의 속 마음을 털어 놓으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왜 이렇게 놀라고 슬퍼하고 힘들어 하실까요? 그는 죄없는 분이시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조롱과 비난과 저주를 받으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던 분이 일시적이지만 그에게 버림을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무게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셨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며 기도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똑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이 잔을 물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을 관철시키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드려야 하는 기도의 모델입니다. 히브리서 5:7에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 속에 있는 정욕과 욕심을 부인하려면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자기를 죽이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 금식을 하면서라도 자기의 욕심을 죽이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세 번씩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그는 한 시간 기도하고 오신 후에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하기에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너무 바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기도할 시간에 잠을 더 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피곤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게 내 마음이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먼저 기도에 시간을 드리는 것이 지혜인물 믿습니다. 우리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사탄의 궤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수록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으셨습니다. 그는 세 번째 그들에게 오사 이르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1,42).”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새롭게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대면하고 질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기도 후에 음성도 달라지고, 전쟁에서 앞장서서 나아가는 장군 같은 담대한 심령과 스피릿을 가지셨습니다.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처럼,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슬픈 마음으로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정복하러 가는 것처럼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기도 후에 이런 힘이 생겼습니다. 겟세마네 기도가 없으면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편하고 자유롭고 낭만적으로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라고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캠퍼스 미션을 위해 살고자 하면 지치고 고민스럽습니다. 이때 기도하고 순종하고자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 마음에 강한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죄를 짓게 하며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자 모든 간계를 써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기도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반면에 사탄은 우리가 자기의 욕심을 이루며 살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그 길이 어리석고 고난의 길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 지혜롭고 생명을 얻고 승리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체포되심(43-52).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라는 신호로 예수님의 볼에 입 맞추었습니다. 참으로 감미로운 배반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기록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과 함께 죽는다 해도 결코 흩어지거나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모습(29, 31)과 현격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실패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자신감만 넘칠 뿐 기도로 준비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37, 40, 41절). 저자 마가는 아주 상세하게 제자들의 실패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심문받으심과 베드로의 부인(53-72).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로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들은 종교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지만 사형을 결정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정식 재판이라기보다는 증거 수집을 위한 심문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증언을 듣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습니다(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6-59).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안 따라갈 수는 없고,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 주님을 따를 때 사탄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회색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이 기회를 엿보며 살다가 사탄의 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었습니다.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던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하며 앞뜰로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비겁하게 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베드로는 또 부인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었습니다. 닭도 베드로의 뻔뻔한 말을 참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보다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베드로는 그 사랑이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그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 앞에서 큰 소리를 쳤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강한 자아가 깨어졌습니다. 그는 수제자로서 면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꺼억꺼억 하며 회개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죽게 되자 자신도 잡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두려움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홀로 심문을 받으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베드로는 한 여종이 물었는데도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그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쳐서 거짓 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쳐서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고소를 들을 때에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고자 결단을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짓 고소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털 깎는 자 앞에 잠담한 양과 같이 잠잠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고소에 침묵하심으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침묵은 큰 울림으로 진실을 만 천하에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은 아닙니다.

  61, 62절을 보십시오.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는 분명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라고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신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또한 인자라는 표현을 써서 바리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는 죽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시110:1)을 그들이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지만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통치권과 심판을 하는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한 자기 선언에 그 앞에 선 사람들은 기가 질렸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영접하고 그를 찬양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소경이고 귀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이사야 50:6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 이십니다.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 같지만 기도하심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가장 지혜로우십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미련하다, 어리석다고 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고 그를 부인하던 자들은 다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사명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심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십자가를 질 힘을 얻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회복하고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기도함으로 초대교회를 이끄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한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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