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10강(13:1-14:24)
페이지 정보

본문
2019년 창세기 제 10 강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19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말씀에 순종할 힘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가 되어야 하고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롯과 아브람의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족장에 불과했던 아브람이 어떻게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리를 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람과 롯의 가치관(13:1-13)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온 후 조카 롯의 가축의 목자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해지자 롯도 덩달아 부자가 된 것입니다. 가축이 얼마 없을 때는 초장이 넓어보였는데 가축들이 많아지자 초장이 부족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려다보니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데 동족끼리 싸우고 있으니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숙부의 권위를 내세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했습니다. 혈족의 족장이면서 삼촌인 아브람이 조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아브람이 보여준 관대함과 평화로움은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이 무엇인가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재물을 앞에 두고 양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선민의 향기를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물질보다도 인간관계, 더 나아가 믿음의 영향력을 더욱 중시했습니다. 물질 앞에서는 가족이 원수이고 권력 앞에서는 형제가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의 사장이 죽으면 자녀들이 유산상속으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피보다 진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개인의 이익보다 가족 간의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롯은 어떠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에 롯의 가치관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양심상 양보하거나 최소한 숙부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소돔까지 나아갔습니다. 롯의 가치관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입니다. 그에게는 내면의 상태를 보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소돔은 겉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지만, 내면은 부패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겉모습보다 속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돈을 많이 주는 기업을 우선적으로 택할 것인가, 아니면 돈은 적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그 직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볼 수 있다면 선택하는데 더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애굽에 다녀온 후에 물질축복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을 이심을 믿게 되었으나, 롯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점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1:15). 가치관의 차이는 일을 시작할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아브람과 롯의 인생을 결산해 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했고 소알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 가치관을 따라서 하게 됩니다. 결혼, 직장, 장래 방향을 잡을 때도 물질적인 유익, 자기의 영광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사람은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선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아닌가, 교회에 덕이 되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선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진리의 영으로 함께 하시고 평강으로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람은 조카 롯을 양자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상속자로 여겼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롯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남으로서 아브람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신앙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롯이 떠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해나간 것입니다. 롯이 떠나자 아브람의 심정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착잡했습니다. 또한 좋은 땅을 양보한 현실 문제 앞에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4-17).” 하나님은 아브람의 현실문제를 당장 해결해 주시기보다 비전을 심어 주심으로 좁아진 마음을 넓혀주셨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좋은 땅을 양보했는데 하나님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롯은 스스로 좋은 것을 택하였지만 아브람은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훨씬 좋은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힘들어 하며 앉아 있는 아브람에게 일어나 그 땅을 종으로 횡으로 돌아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간 롯을 생각하며 그리고 자식 하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마음이 어둡고 절망적이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소망이 다시 넘쳤습니다.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순종해서 밟으며 다시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여호와를 위하여 새롭게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자녀들과 양들을 도울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한 선교사님은 사랑 문제로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 대신 상하심으로 나음을 입게 된 말씀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인생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인생의 허무로 고민하였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그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영접하자 생명이 마음에 충만해짐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하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문제로 고민하던 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문제에 해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샛별과 같이 떠오르기까지 공부하며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말씀 공부를 통해서 성경적인 인간관, 가치관, 물질관, 결혼관, 역사관, 세계관을 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24)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님 왕 세메벨롸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웠습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은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으로서 그는 첫 바벨론 왕조의 여섯 번째 왕으로 엘람인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나라 전체를 자기의 지배 아래 통일한 왕이었습니다. ‘시날’은 현재 이라크 지역이고, ‘엘람’은 현재 이란의 일부입니다.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북부 메소포타미아 동맹국과 소돔 고모라를 포함한 5개 사해 남부 연합국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해 남부 국가들이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거부한 것으로 인해서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사해 남부 연합국이 패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롯이 사로잡혀 간 것입니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즉시 자신과 동맹한 사람들과 함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었습니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것을 챙겨가지고 떠난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과거 자기에게 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그에게 담력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원수의 소굴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목자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용기를 주고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도 양을 찾기 위해서 곰과 사자를 대항하고, 자기 백성을 모욕하는 골리앗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물어가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가 세상의 권세 잡은 사탄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웠습니다. 또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돌라오멜도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중국도 미국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란 어떤 존재와도 비길 수 없는 유일하시고 절대적이고 최고로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키고 승리의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즉 전리품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쳐서 조카 롯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승리한 것은 뛰어난 전략이나 전술이나 동맹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에 기초해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3). 이런 약속이 그돌라오멜 동맹군과의 싸움에 적용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주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도 승리를 주셔서 반드시 성서한국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싸우고 아브람과 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실제적인 싸움은 무엇입니까? 가치관의 싸움이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죄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있습니다. 나의 정욕에 순종하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싸움이 있습니다. 또한 이단들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단들은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과의 싸움으로 보고 사람을 조종하고자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온 왕이 또 있었습니다. 그는 소돔 왕이었습니다.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이상한 제안을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의 재산과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패배한 왕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브람에게 물품을 주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손 안대고 코풀고자 하는 뻔뻔하고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22-24).”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부자가 된 것이 자신의 도움때문이라고 말할까봐 이를 미리 차단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고 또 축복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승리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잘 보존하고 지켰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되찾아온 사람들과 재물 모두를 차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돔 왕에게 사람과 물질을 다 되돌려주었습니다. 다만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은 그들이 가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리품은 그들의 정당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1/10을 바치고 세상에서는 깨끗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세상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물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큰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는 왕 중 왕으로서 대범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이 물질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믿고 행동함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물질의 부족함을 항상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청빈한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잘 보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의 싸움이 있지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편에 서서 싸움으로 승리를 체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19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말씀에 순종할 힘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가 되어야 하고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롯과 아브람의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족장에 불과했던 아브람이 어떻게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리를 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람과 롯의 가치관(13:1-13)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온 후 조카 롯의 가축의 목자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해지자 롯도 덩달아 부자가 된 것입니다. 가축이 얼마 없을 때는 초장이 넓어보였는데 가축들이 많아지자 초장이 부족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려다보니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데 동족끼리 싸우고 있으니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숙부의 권위를 내세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했습니다. 혈족의 족장이면서 삼촌인 아브람이 조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아브람이 보여준 관대함과 평화로움은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이 무엇인가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재물을 앞에 두고 양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선민의 향기를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물질보다도 인간관계, 더 나아가 믿음의 영향력을 더욱 중시했습니다. 물질 앞에서는 가족이 원수이고 권력 앞에서는 형제가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의 사장이 죽으면 자녀들이 유산상속으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피보다 진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개인의 이익보다 가족 간의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롯은 어떠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에 롯의 가치관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양심상 양보하거나 최소한 숙부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소돔까지 나아갔습니다. 롯의 가치관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입니다. 그에게는 내면의 상태를 보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소돔은 겉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지만, 내면은 부패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겉모습보다 속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돈을 많이 주는 기업을 우선적으로 택할 것인가, 아니면 돈은 적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그 직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볼 수 있다면 선택하는데 더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애굽에 다녀온 후에 물질축복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을 이심을 믿게 되었으나, 롯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점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1:15). 가치관의 차이는 일을 시작할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아브람과 롯의 인생을 결산해 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했고 소알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 가치관을 따라서 하게 됩니다. 결혼, 직장, 장래 방향을 잡을 때도 물질적인 유익, 자기의 영광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사람은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선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아닌가, 교회에 덕이 되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선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진리의 영으로 함께 하시고 평강으로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람은 조카 롯을 양자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상속자로 여겼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롯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남으로서 아브람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신앙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롯이 떠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해나간 것입니다. 롯이 떠나자 아브람의 심정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착잡했습니다. 또한 좋은 땅을 양보한 현실 문제 앞에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4-17).” 하나님은 아브람의 현실문제를 당장 해결해 주시기보다 비전을 심어 주심으로 좁아진 마음을 넓혀주셨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좋은 땅을 양보했는데 하나님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롯은 스스로 좋은 것을 택하였지만 아브람은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훨씬 좋은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힘들어 하며 앉아 있는 아브람에게 일어나 그 땅을 종으로 횡으로 돌아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간 롯을 생각하며 그리고 자식 하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마음이 어둡고 절망적이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소망이 다시 넘쳤습니다.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순종해서 밟으며 다시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여호와를 위하여 새롭게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자녀들과 양들을 도울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한 선교사님은 사랑 문제로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 대신 상하심으로 나음을 입게 된 말씀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인생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인생의 허무로 고민하였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그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영접하자 생명이 마음에 충만해짐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하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문제로 고민하던 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문제에 해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샛별과 같이 떠오르기까지 공부하며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말씀 공부를 통해서 성경적인 인간관, 가치관, 물질관, 결혼관, 역사관, 세계관을 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24)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님 왕 세메벨롸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웠습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은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으로서 그는 첫 바벨론 왕조의 여섯 번째 왕으로 엘람인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나라 전체를 자기의 지배 아래 통일한 왕이었습니다. ‘시날’은 현재 이라크 지역이고, ‘엘람’은 현재 이란의 일부입니다.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북부 메소포타미아 동맹국과 소돔 고모라를 포함한 5개 사해 남부 연합국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해 남부 국가들이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거부한 것으로 인해서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사해 남부 연합국이 패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롯이 사로잡혀 간 것입니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즉시 자신과 동맹한 사람들과 함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었습니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것을 챙겨가지고 떠난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과거 자기에게 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그에게 담력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원수의 소굴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목자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용기를 주고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도 양을 찾기 위해서 곰과 사자를 대항하고, 자기 백성을 모욕하는 골리앗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물어가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가 세상의 권세 잡은 사탄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웠습니다. 또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돌라오멜도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중국도 미국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란 어떤 존재와도 비길 수 없는 유일하시고 절대적이고 최고로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키고 승리의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즉 전리품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쳐서 조카 롯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승리한 것은 뛰어난 전략이나 전술이나 동맹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에 기초해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3). 이런 약속이 그돌라오멜 동맹군과의 싸움에 적용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주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도 승리를 주셔서 반드시 성서한국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싸우고 아브람과 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실제적인 싸움은 무엇입니까? 가치관의 싸움이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죄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있습니다. 나의 정욕에 순종하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싸움이 있습니다. 또한 이단들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단들은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과의 싸움으로 보고 사람을 조종하고자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온 왕이 또 있었습니다. 그는 소돔 왕이었습니다.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이상한 제안을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의 재산과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패배한 왕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브람에게 물품을 주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손 안대고 코풀고자 하는 뻔뻔하고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22-24).”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부자가 된 것이 자신의 도움때문이라고 말할까봐 이를 미리 차단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고 또 축복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승리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잘 보존하고 지켰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되찾아온 사람들과 재물 모두를 차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돔 왕에게 사람과 물질을 다 되돌려주었습니다. 다만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은 그들이 가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리품은 그들의 정당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1/10을 바치고 세상에서는 깨끗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세상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물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큰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는 왕 중 왕으로서 대범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이 물질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믿고 행동함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물질의 부족함을 항상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청빈한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잘 보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의 싸움이 있지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편에 서서 싸움으로 승리를 체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