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17강(25:1-26:35)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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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17 강
말씀 | 창세기 25:1-26:35
요절 | 창세기 26:3,4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약속의 땅에 태어났고 거기 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짐승도 사람도 살 수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또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떠나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 시간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자식이 없는 문제로 기도의 훈련을 하셨습니다. 25:19-34에는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이를 얻기 위하여 후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2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하였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직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25년 동안 기도하며 인내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습니다.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면서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기도하면서 불임으로 마음고생이 큰 리브가를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자식을 낳게 하셔서 반드시 계승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공처가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UBF 목자들은 다 공처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형제 중에서 정경화, 정명훈, 정명소 세 자녀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운 어머니는 그 남편이 공처가로서 무엇을 하든지 잘 한다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어서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자녀들을 지원하는 일이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사랑하고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고 지원했기 때문에 리브가는 기죽지 아니하고 천만인의 어머니로서 믿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20년 동안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도 기도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 때문입니다(요일 5:14,15). 아브라함도 이삭이 75세가 될 때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잘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삭 자신이 믿음의 자녀입니다.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실하게 기도하면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임신하여 태동이 있을 때에 그 아들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발길질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이때 리브가는 산부인과에 가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묻자왔습니다(22). 리브가도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해산 기한이 다 되어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습니다. 에서는 겉 모습을 따라서, 야곱은 내면을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뺏는 사람, 속이는 사람,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청하였습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흥정을 하였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며 야곱의 요청에 따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습니다. 에서는 배고픔을 잘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2:16은 에서가 망령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정신이 흐려 분별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속된 사람, 불경건한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역사를 귀하게 여기고 주인공으로 쓰임 받고자 하는 영적인 가치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마침내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의 첫 열매로 여겼고(49:3),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출22:28). 장자는 상속자로서 재산을 상속받을 때 형제들보다 두 몫을 받았고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대하21:3). 무엇보다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언약의 계승자가 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야곱은 영적인 소원이 많았지만 꼼수가 많은 인간적인 사람이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언약의 계승자로서 합당한 품성을 덧입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과 경쟁해서 쟁취하는 사람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람과 경쟁하던 데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기근의 때에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이삭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당해서 하나님은 이제 이삭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삭에게 계승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삭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기근이 들어 계속하여 남아 있다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약속의 땅에 남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어서 늘 물이 풍족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비가 오지 아니하면 짐승이건 사람이건 다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랄은 블레셋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곳 백성은 리브가가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에 남편인 이삭을 죽이고 리브가를 빼앗아 갈 수 있는 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가정을 엿보던 아비멜렉이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창으로 내다보고 그들이 부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공포함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니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흉년 중에도 풍년이 되고 불황 중에서도 호황이 됩니다. 자기 노력과 성실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다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고기를 달라고 우는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기도합니다. 그런데 새총으로 메추라기를 한 마리, 한 마리 잡기보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메추라기를 몰아서 떨어지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우리의 노력과 성실을 훨씬 뛰어 넘는 결과가 있습니다.
셋째, 축복의 때에 우물을 열심히 판 이삭.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기근과 아비멜렉 왕의 위협으로 그 땅을 떠나야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고 떠나라고 위협하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입니다. 중동 지방에서 우물은 생명선과 같은 것입니다. 우물을 막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땅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또 떠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고 캠퍼스에서 전도하며 제자 양성을 하지만 열매가 없고 또 나이가 들어 열매 맺을 소망이 줄어들면 이 땅을 떠나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또 인간관계의 갈등과 어려움으로 사명의 땅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남는 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남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계속하여 귀하게 쓰십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아버지 때에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현실 속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입니다.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텃새를 부린 것입니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이삭은 그랄을 떠나라는 아비멜렉 왕의 말을 들었지만 약속의 땅에 계속 거하면서 우물 파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중동에서 우물을 파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대개 30미터 깊이로 땅을 파야 합니다. 그는 블레셋의 그랄 사람들의 시기로 우물을 파고 양보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축복의 때에 자족하지 아니하고 우물을 팜으로써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을 따라서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양보하면서 우물을 팠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넓은 땅으로 인도하셔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때에 축복 자체를 붙잡고자 애를 쓰게 되면 사람들과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만약 이삭이 믿음에 기초하지 않은 양보를 계속했다면 그는 손해의식과 미움의 노예가 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노나 미움, 투기와 같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 때문에 싸우지 않았고 정당성 때문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과 상대하여 싸우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참고 양보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힘이 없어서 빼앗긴 것 같고 패배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물을 양보한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용사였습니다.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눈에 보이는 축복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22). 르호봇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도 말씀의 샘을 깊이 파서 생수가 풍성히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양떼들이 풍족히 먹고 번성하게 됩니다. 사탄의 시기와 공격이 있을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와 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 전하는 일에 전심할 때 사탄의 공격을 파하고 생명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의 샘을 파서 생수를 마시고 나눌 때 생명의 역사는 흥왕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이 왜 두려웠을까요? 반복되는 다툼과 시기와 위협을 받을 때 두려웠을 것입니다. 남의 땅에서 잘 되니 그들의 시기와 질투와 공격을 받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26-28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이방인들이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고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이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삭은 조용한 사람으로서 축복자체보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다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강포하고 대적이 심하고 싸우고 뺏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이 독해져야 하고 물고 뜯고 싸워야 할까요? 목소리도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삭은 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겼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서 생수를 얻고 나누는 가운데 그의 축복으로 인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25:1-26:35
요절 | 창세기 26:3,4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약속의 땅에 태어났고 거기 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짐승도 사람도 살 수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또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떠나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 시간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자식이 없는 문제로 기도의 훈련을 하셨습니다. 25:19-34에는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이를 얻기 위하여 후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2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하였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직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25년 동안 기도하며 인내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습니다.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면서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기도하면서 불임으로 마음고생이 큰 리브가를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자식을 낳게 하셔서 반드시 계승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공처가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UBF 목자들은 다 공처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형제 중에서 정경화, 정명훈, 정명소 세 자녀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운 어머니는 그 남편이 공처가로서 무엇을 하든지 잘 한다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어서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자녀들을 지원하는 일이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사랑하고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고 지원했기 때문에 리브가는 기죽지 아니하고 천만인의 어머니로서 믿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20년 동안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도 기도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 때문입니다(요일 5:14,15). 아브라함도 이삭이 75세가 될 때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잘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삭 자신이 믿음의 자녀입니다.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실하게 기도하면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임신하여 태동이 있을 때에 그 아들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발길질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이때 리브가는 산부인과에 가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묻자왔습니다(22). 리브가도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해산 기한이 다 되어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습니다. 에서는 겉 모습을 따라서, 야곱은 내면을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뺏는 사람, 속이는 사람,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청하였습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흥정을 하였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며 야곱의 요청에 따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습니다. 에서는 배고픔을 잘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2:16은 에서가 망령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정신이 흐려 분별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속된 사람, 불경건한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역사를 귀하게 여기고 주인공으로 쓰임 받고자 하는 영적인 가치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마침내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의 첫 열매로 여겼고(49:3),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출22:28). 장자는 상속자로서 재산을 상속받을 때 형제들보다 두 몫을 받았고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대하21:3). 무엇보다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언약의 계승자가 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야곱은 영적인 소원이 많았지만 꼼수가 많은 인간적인 사람이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언약의 계승자로서 합당한 품성을 덧입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과 경쟁해서 쟁취하는 사람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람과 경쟁하던 데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기근의 때에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이삭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당해서 하나님은 이제 이삭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삭에게 계승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삭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기근이 들어 계속하여 남아 있다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약속의 땅에 남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어서 늘 물이 풍족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비가 오지 아니하면 짐승이건 사람이건 다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랄은 블레셋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곳 백성은 리브가가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에 남편인 이삭을 죽이고 리브가를 빼앗아 갈 수 있는 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가정을 엿보던 아비멜렉이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창으로 내다보고 그들이 부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공포함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니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흉년 중에도 풍년이 되고 불황 중에서도 호황이 됩니다. 자기 노력과 성실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다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고기를 달라고 우는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기도합니다. 그런데 새총으로 메추라기를 한 마리, 한 마리 잡기보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메추라기를 몰아서 떨어지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우리의 노력과 성실을 훨씬 뛰어 넘는 결과가 있습니다.
셋째, 축복의 때에 우물을 열심히 판 이삭.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기근과 아비멜렉 왕의 위협으로 그 땅을 떠나야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고 떠나라고 위협하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입니다. 중동 지방에서 우물은 생명선과 같은 것입니다. 우물을 막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땅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또 떠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고 캠퍼스에서 전도하며 제자 양성을 하지만 열매가 없고 또 나이가 들어 열매 맺을 소망이 줄어들면 이 땅을 떠나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또 인간관계의 갈등과 어려움으로 사명의 땅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남는 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남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계속하여 귀하게 쓰십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아버지 때에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현실 속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입니다.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텃새를 부린 것입니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이삭은 그랄을 떠나라는 아비멜렉 왕의 말을 들었지만 약속의 땅에 계속 거하면서 우물 파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중동에서 우물을 파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대개 30미터 깊이로 땅을 파야 합니다. 그는 블레셋의 그랄 사람들의 시기로 우물을 파고 양보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축복의 때에 자족하지 아니하고 우물을 팜으로써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을 따라서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양보하면서 우물을 팠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넓은 땅으로 인도하셔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때에 축복 자체를 붙잡고자 애를 쓰게 되면 사람들과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만약 이삭이 믿음에 기초하지 않은 양보를 계속했다면 그는 손해의식과 미움의 노예가 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노나 미움, 투기와 같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 때문에 싸우지 않았고 정당성 때문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과 상대하여 싸우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참고 양보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힘이 없어서 빼앗긴 것 같고 패배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물을 양보한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용사였습니다.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눈에 보이는 축복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22). 르호봇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도 말씀의 샘을 깊이 파서 생수가 풍성히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양떼들이 풍족히 먹고 번성하게 됩니다. 사탄의 시기와 공격이 있을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와 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 전하는 일에 전심할 때 사탄의 공격을 파하고 생명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의 샘을 파서 생수를 마시고 나눌 때 생명의 역사는 흥왕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이 왜 두려웠을까요? 반복되는 다툼과 시기와 위협을 받을 때 두려웠을 것입니다. 남의 땅에서 잘 되니 그들의 시기와 질투와 공격을 받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26-28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이방인들이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고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이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삭은 조용한 사람으로서 축복자체보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다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강포하고 대적이 심하고 싸우고 뺏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이 독해져야 하고 물고 뜯고 싸워야 할까요? 목소리도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삭은 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겼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서 생수를 얻고 나누는 가운데 그의 축복으로 인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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