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20년 롬9강(7:1-25) 바울의 탄식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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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 9 강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
바울의 탄식과 감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난 주 우리는 구원 받은 이후에 의의 종으로서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율법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삶에는 이를 지킬 수 없기에 피곤함과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할 때 따르는 갈등을 7장에서 다루고 8장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다룹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율법과 죄와 나의 삼각관계를 이해할 때 다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율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시간 율법의 역할과 그 안에서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법 아는 형제들에게 말을 합니다.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고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다가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죽으면 기소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율법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6:14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사람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어서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결혼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됩니다. 남편인 율법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이고 본이 될만 합니다. 방청소도 깨끗하게 해 놓고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철저하게 해서 부엌의 그릇들은 항상 반질반질하게 빛이 났습니다. 자기 관리도 철저하게 해서 항상 젊은이처럼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율법씨가 아내에게도 이런 삶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피곤해서 집안이 지저분하다거나 그릇이 씽크대에 쌓이거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판단과 정죄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여인은 남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애를 써보았지만 그 기준에 늘 미달이라 사는 것이 죽을 맛이었습니다. 설거지를 아무리 열심히 해 놓아도 그릇을 검사해서 닦이지 않은 것을 찾아내서 늘 판단을 했습니다. 몸이 힘들고 피곤하여 청소를 해 놓지 않으면 인상을 찌푸리는 남편을 보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만일 남편이 죽으면 여인은 겉으로는 슬퍼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릅니다. “이제 자유다!”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고 새 생명을 얻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율법씨는 죽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 가서 그와 연합을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심지를 살려서 빛을 발하게 하시고 상한 갈대를 회복하여 귀하게 쓰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자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우리는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함으로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고 그 삯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고 은혜가 충만하여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늘 새롭게 되지 않으면 낡아지고 형식화되고 굳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할 때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율법은 거듭난 신자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상황과 현실을 파악하고 합당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늘 허락하시고 힘있게 주님을 섬기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5절을 받아서 율법에 대해서 7절부터 설명을 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 거룩하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은 우리에게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죄에 더욱 매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을 지키자고 다짐을 하지만 한두 달만 지나면 다시 늦고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시간을 지키자는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율법적인 것이냐, 은혜로 해야 하지 않느냐 시끄러워집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 중에서 열 번째 계명입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과거에는 탐심을 죄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욕심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욕심을 성경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안일과 게으름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본성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죄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깨닫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본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의의 길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이 우리 의식 속에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죄는 더욱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죄를 억제하거나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인식할수록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이것을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
12절은 7-11절의 결론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죄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그 분의 완전하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제 율법과 죄와 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합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은혜를 은혜 되게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자신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죄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선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외부로부터 구원이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두 싸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싸움의 결과는 죄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백번, 천번 위로 던져도 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은 탄식을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은 죄와 율법의 세계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의 탄식입니다.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율법에 순종하도록 선지자들을 보내 외쳤지만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수님께서 지적한 대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남의 눈에 티끌을 보지만 내 눈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인간은 모순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동일하게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2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은 죄와 율법의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규하던 데에서 갑자기 감사를 합니다.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덧입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신으로 인해서 감사를 합니다. 죄와 율법의 세계 속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생동안 죄에게 지기만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승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죄의 세력을 압도하십니다. 우리는 8장부터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사는 신자의 복된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에게서 죄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고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신자들 속에서 이런 죄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기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서 죄를 발견할 때 실망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은혜가 충만할 때는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율법적인 방식으로 규율을 정하고 은혜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율법적인 투쟁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또 항상 절망하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은혜로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합니다. 율법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때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힘들면 쉬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구원자,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
바울의 탄식과 감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난 주 우리는 구원 받은 이후에 의의 종으로서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율법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삶에는 이를 지킬 수 없기에 피곤함과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할 때 따르는 갈등을 7장에서 다루고 8장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다룹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율법과 죄와 나의 삼각관계를 이해할 때 다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율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시간 율법의 역할과 그 안에서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법 아는 형제들에게 말을 합니다.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고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다가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죽으면 기소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율법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6:14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사람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어서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결혼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됩니다. 남편인 율법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이고 본이 될만 합니다. 방청소도 깨끗하게 해 놓고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철저하게 해서 부엌의 그릇들은 항상 반질반질하게 빛이 났습니다. 자기 관리도 철저하게 해서 항상 젊은이처럼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율법씨가 아내에게도 이런 삶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피곤해서 집안이 지저분하다거나 그릇이 씽크대에 쌓이거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판단과 정죄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여인은 남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애를 써보았지만 그 기준에 늘 미달이라 사는 것이 죽을 맛이었습니다. 설거지를 아무리 열심히 해 놓아도 그릇을 검사해서 닦이지 않은 것을 찾아내서 늘 판단을 했습니다. 몸이 힘들고 피곤하여 청소를 해 놓지 않으면 인상을 찌푸리는 남편을 보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만일 남편이 죽으면 여인은 겉으로는 슬퍼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릅니다. “이제 자유다!”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고 새 생명을 얻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율법씨는 죽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 가서 그와 연합을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심지를 살려서 빛을 발하게 하시고 상한 갈대를 회복하여 귀하게 쓰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자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우리는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함으로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고 그 삯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고 은혜가 충만하여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늘 새롭게 되지 않으면 낡아지고 형식화되고 굳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할 때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율법은 거듭난 신자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상황과 현실을 파악하고 합당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늘 허락하시고 힘있게 주님을 섬기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5절을 받아서 율법에 대해서 7절부터 설명을 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 거룩하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은 우리에게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죄에 더욱 매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을 지키자고 다짐을 하지만 한두 달만 지나면 다시 늦고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시간을 지키자는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율법적인 것이냐, 은혜로 해야 하지 않느냐 시끄러워집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 중에서 열 번째 계명입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과거에는 탐심을 죄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욕심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욕심을 성경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안일과 게으름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본성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죄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깨닫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본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의의 길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이 우리 의식 속에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죄는 더욱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죄를 억제하거나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인식할수록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이것을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
12절은 7-11절의 결론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죄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그 분의 완전하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제 율법과 죄와 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합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은혜를 은혜 되게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자신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죄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선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외부로부터 구원이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두 싸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싸움의 결과는 죄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백번, 천번 위로 던져도 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은 탄식을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은 죄와 율법의 세계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의 탄식입니다.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율법에 순종하도록 선지자들을 보내 외쳤지만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수님께서 지적한 대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남의 눈에 티끌을 보지만 내 눈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인간은 모순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동일하게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2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은 죄와 율법의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규하던 데에서 갑자기 감사를 합니다.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덧입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신으로 인해서 감사를 합니다. 죄와 율법의 세계 속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생동안 죄에게 지기만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승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죄의 세력을 압도하십니다. 우리는 8장부터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사는 신자의 복된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에게서 죄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고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신자들 속에서 이런 죄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기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서 죄를 발견할 때 실망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은혜가 충만할 때는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율법적인 방식으로 규율을 정하고 은혜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율법적인 투쟁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또 항상 절망하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은혜로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합니다. 율법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때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힘들면 쉬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구원자,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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