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15(9:18-38)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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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5 강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28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오늘은 네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것,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신 것,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과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각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왔고 끈질기게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이들의 믿음을 보셨고 또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고통 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간구하였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장사지낼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온 이 관리는 누구입니까?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는 죽은 딸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 죽었는데 더 이상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며 체념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병들었을 때는 고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죽으면 장례를 지내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딸을 살려내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각종 병든 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자신의 죽은 딸도 살려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시면 아이가 살아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심으로 생명을 전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믿음의 사람 야이로를 따라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은 일종의 부인병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혈하는 고질병입니다. 여인은 피를 많이 흘려서 빈혈에 시달리고 얼굴이 창백하고 매사에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하며, 그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되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마가복음 5장 26절을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을 다 만나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여인의 혈루증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삶이 있는 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고질병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던 중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예수님에게 나가는 데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놀랍게도 여인에게는 장애물을 넘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스마트 폰을 원 터치만 해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상품을 원 터치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믿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병이 낫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원 터치의 원조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전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겉옷 가를 살짝 만졌습니다. 여인이 겉옷을 만졌을 때 여인의 혈루 근원이 바짝 말랐습니다(막 5:29). 12년 동안이나 여인을 괴롭혀 왔던 지긋지긋한 혈루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요란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피상적인데도 그 작은 믿음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 많지 않고 많이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용하지만 힘있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공로보다도 믿음이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였지만 믿음으로 만진 이 여인만 나았습니다. 우리가 치료받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표현은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이런 기적의 역사를 지금도 이루십니다.
천정은이란 분은 2012년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통해 좋아졌는데 다시 재발해서 2016년에 폐와 기도, 림프절까지 전이되었습니다. 지금도 치료 중인데 항암치료를 81차까지 받았습니다. 8년을 암과 싸우고 있습니다. 천정은씨는 처음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언니의 끈질긴 권유로 성경공부를 하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말씀을 읽던 중에 로마서 10:9 말씀이 심령에 임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자신이 말기암으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이사야 43:1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몸도 주님의 것이고 암도 주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짝사랑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기쁨이 넘치고 천국에 들어갈 소망에 마냥 들뜬 나날을 보냈습니다. 항암치료 중에 주삿바늘이 두렵지 않고, 검사 중에 혈관이 터져도 감사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뼈 사진을 찍어보니 암이 갉아먹은 자리에 새로운 뼈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지고 골반에도 새로운 뼈가 자라났습니다. 의사들도 놀랐습니다. 이 분은 너무나 감사해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간증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분은 성경을 읽을 때 대충대충 읽지 않습니다. 받은 그 말씀들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전달되었습니다. 여든 한 번이나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지금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만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여인의 믿음의 행동을 감지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여인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로 영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고 위로해주십니다.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해 부정하였고, 은밀하게 율법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양심은 정죄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부정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스런 딸로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여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여자를 볼 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관리의 집에 들어가시니 장송곡을 내며 피리를 불고 사람들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장례가 나면 최소한 2명의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1명의 곡하는 여인을 불러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피 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자는데 주위 사람들이 슬피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지 말라며, 떠들며 곡하는 사람들을 물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잠을 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자 구슬프게 울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내보낸 후에 소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 전에 불신의 사람들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잠은 겉모습은 같지만 사실은 매우 다릅니다. 잠든 사람은 다시 깨어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죽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깨어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쉬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믿음이 없이 죽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은 사람은 쉼을 누리다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 다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이 이 소녀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났습니다(25). 야이로의 믿음대로 예수님이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생명이 전가되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생명의 풍성함을 날마다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죽음이 없습니다. 잠시 잠을 잘 수 있지만 영원한 죽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을 괴롭혀 온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예외가 없다는 점에서 잔인합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자 몸부림치지만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세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음 앞으로 다가선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의 종노릇을 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죽으면 영원히 이별을 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통곡합니다. 지난 주 서울 시장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을 생각할 때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죽음을 잠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최고의 상급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생을 얻습니다. 그와 교제를 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27-33).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때였습니다.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소경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어 대부분 마사지나 구걸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영적 소경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인줄 생각합니다.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두 맹인들은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눈을 뜨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사람은 소원이 간절해지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들을 수 있도록 목청껏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의 끈질긴 기도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으로 쏙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까지 따라 들어갈 기세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맹인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맹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들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들은 맹인이지만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고 믿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권세는 질병과 귀신들과 자연과 죽음의 영역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 먼 자들을 능히 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이라고 하여서 미래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포이에싸이로 과거형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이미 병을 치료한 것을 믿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치료되지 않았지만 이미 치료된 것으로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질 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그들의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던지 주일 메시지를 듣던지 주님의 말씀이 내게 들리면, 한 말씀이 내 마음에 꽂히면 “됐다”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안 된다, 해도 안 된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라며 포기하고 절망하도록 이끕니다. 안 된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탄이 아무리 많은 불신과 염려와 두려움을 심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고 믿음이 생기면 믿는 대로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면 영적인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게 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을 만지시고 은혜를 주시면 답답한 미래가 보입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에 말씀하시면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임하듯이 막힌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떠오릅니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 모임의 앞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하였습니다. 귀신은 해야 할 말도 못하게 하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성경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5:5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메시아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놀라운 치유와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질병이 치료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막힌 입이 열립니다. 귀신은 두려움을 심어 우리에게 말을 못하게 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도 자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는 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려움, 운명과 한계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 가운데서 도전하고 개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루터는 열이 없는 불이 존재하지 않듯이 도전적인 기도가 없이는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쳐 놓은 한계의 장벽을 거두어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 속에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추수할 만큼 무르익었는데 추수할 일꾼들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은 많지만 일꾼은 부족합니다. 병들고, 마음이 상하고, 방황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할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28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오늘은 네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것,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신 것,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과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각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왔고 끈질기게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이들의 믿음을 보셨고 또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고통 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간구하였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장사지낼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온 이 관리는 누구입니까?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는 죽은 딸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 죽었는데 더 이상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며 체념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병들었을 때는 고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죽으면 장례를 지내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딸을 살려내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각종 병든 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자신의 죽은 딸도 살려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시면 아이가 살아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심으로 생명을 전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믿음의 사람 야이로를 따라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은 일종의 부인병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혈하는 고질병입니다. 여인은 피를 많이 흘려서 빈혈에 시달리고 얼굴이 창백하고 매사에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하며, 그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되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마가복음 5장 26절을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을 다 만나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여인의 혈루증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삶이 있는 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고질병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던 중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예수님에게 나가는 데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놀랍게도 여인에게는 장애물을 넘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스마트 폰을 원 터치만 해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상품을 원 터치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믿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병이 낫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원 터치의 원조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전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겉옷 가를 살짝 만졌습니다. 여인이 겉옷을 만졌을 때 여인의 혈루 근원이 바짝 말랐습니다(막 5:29). 12년 동안이나 여인을 괴롭혀 왔던 지긋지긋한 혈루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요란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피상적인데도 그 작은 믿음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 많지 않고 많이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용하지만 힘있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공로보다도 믿음이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였지만 믿음으로 만진 이 여인만 나았습니다. 우리가 치료받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표현은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이런 기적의 역사를 지금도 이루십니다.
천정은이란 분은 2012년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통해 좋아졌는데 다시 재발해서 2016년에 폐와 기도, 림프절까지 전이되었습니다. 지금도 치료 중인데 항암치료를 81차까지 받았습니다. 8년을 암과 싸우고 있습니다. 천정은씨는 처음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언니의 끈질긴 권유로 성경공부를 하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말씀을 읽던 중에 로마서 10:9 말씀이 심령에 임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자신이 말기암으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이사야 43:1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몸도 주님의 것이고 암도 주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짝사랑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기쁨이 넘치고 천국에 들어갈 소망에 마냥 들뜬 나날을 보냈습니다. 항암치료 중에 주삿바늘이 두렵지 않고, 검사 중에 혈관이 터져도 감사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뼈 사진을 찍어보니 암이 갉아먹은 자리에 새로운 뼈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지고 골반에도 새로운 뼈가 자라났습니다. 의사들도 놀랐습니다. 이 분은 너무나 감사해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간증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분은 성경을 읽을 때 대충대충 읽지 않습니다. 받은 그 말씀들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전달되었습니다. 여든 한 번이나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지금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만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여인의 믿음의 행동을 감지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여인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로 영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고 위로해주십니다.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해 부정하였고, 은밀하게 율법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양심은 정죄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부정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스런 딸로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여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여자를 볼 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관리의 집에 들어가시니 장송곡을 내며 피리를 불고 사람들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장례가 나면 최소한 2명의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1명의 곡하는 여인을 불러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피 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자는데 주위 사람들이 슬피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지 말라며, 떠들며 곡하는 사람들을 물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잠을 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자 구슬프게 울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내보낸 후에 소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 전에 불신의 사람들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잠은 겉모습은 같지만 사실은 매우 다릅니다. 잠든 사람은 다시 깨어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죽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깨어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쉬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믿음이 없이 죽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은 사람은 쉼을 누리다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 다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이 이 소녀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났습니다(25). 야이로의 믿음대로 예수님이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생명이 전가되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생명의 풍성함을 날마다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죽음이 없습니다. 잠시 잠을 잘 수 있지만 영원한 죽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을 괴롭혀 온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예외가 없다는 점에서 잔인합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자 몸부림치지만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세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음 앞으로 다가선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의 종노릇을 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죽으면 영원히 이별을 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통곡합니다. 지난 주 서울 시장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을 생각할 때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죽음을 잠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최고의 상급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생을 얻습니다. 그와 교제를 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27-33).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때였습니다.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소경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어 대부분 마사지나 구걸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영적 소경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인줄 생각합니다.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두 맹인들은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눈을 뜨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사람은 소원이 간절해지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들을 수 있도록 목청껏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의 끈질긴 기도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으로 쏙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까지 따라 들어갈 기세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맹인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맹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들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들은 맹인이지만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고 믿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권세는 질병과 귀신들과 자연과 죽음의 영역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 먼 자들을 능히 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이라고 하여서 미래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포이에싸이로 과거형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이미 병을 치료한 것을 믿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치료되지 않았지만 이미 치료된 것으로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질 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그들의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던지 주일 메시지를 듣던지 주님의 말씀이 내게 들리면, 한 말씀이 내 마음에 꽂히면 “됐다”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안 된다, 해도 안 된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라며 포기하고 절망하도록 이끕니다. 안 된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탄이 아무리 많은 불신과 염려와 두려움을 심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고 믿음이 생기면 믿는 대로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면 영적인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게 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을 만지시고 은혜를 주시면 답답한 미래가 보입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에 말씀하시면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임하듯이 막힌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떠오릅니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 모임의 앞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하였습니다. 귀신은 해야 할 말도 못하게 하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성경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5:5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메시아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놀라운 치유와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질병이 치료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막힌 입이 열립니다. 귀신은 두려움을 심어 우리에게 말을 못하게 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도 자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는 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려움, 운명과 한계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 가운데서 도전하고 개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루터는 열이 없는 불이 존재하지 않듯이 도전적인 기도가 없이는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쳐 놓은 한계의 장벽을 거두어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 속에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추수할 만큼 무르익었는데 추수할 일꾼들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은 많지만 일꾼은 부족합니다. 병들고, 마음이 상하고, 방황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할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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