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28m(19:1-22) 영생을 얻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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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8 강
말씀 | 마태복음 19:1-22
요절 | 마태복음 19:21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천국 백성인 우리가 영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혼 생활을 하면서 가정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을 영접함으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질을 희생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특별히 죄로 인해 낙원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갈망하는 그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삶의 질이 높아지자 100세를 사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늙으면 빨리 죽어야겠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이 본심일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부자 청년도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창세기를 공부해보면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영생을 잃어버리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은 누구나 영생을 갈구합니다. 영생은 시간의 계속일뿐만 아니라 변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도 지루한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그렇습니다.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면 이것이 어찌 진정한 영생이겠습니까? 영생은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영생을 간절히 원하는 부자 청년을 도와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기특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그는 관리이고 부자이며 청년입니다. 그는 젊음, 재물, 권력을 다 얻었으니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개 젊으면서 부자이고 권력을 얻게 되면 어떤 종류의 마약을 해보았는지가 그들 세계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재벌 2세들이 마약을 하다 걸려서 검찰 조사를 받는 뉴스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따라 거룩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율법적인 삶으로 인해 그의 영혼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피곤했습니다. 그는 삶에 낙이 없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주님께 영생을 간구한 것을 보면 그의 갈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죄악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원했습니다. 무기력한 삶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원했습니다. 세상에 밀려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분명한 신념과 목적과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마지못해 사는 지겨운 삶이 아니라 기쁨과 활력과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구한 영생은 한마디로 영원하고도 행복한 삶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선한 생활을 했지만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뻥 뚫린 마음과 허무로 인해 삶의 의욕이 없었습니다. 영생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편리합니다. 대부분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즐거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면 깊은 곳에 영생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전3:11). 파스칼은 ‘사람이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생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영생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인생 문제입니다. 이 청년도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배운 대로 율법을 지키므로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율법을 지켰는데도 영생을 누릴 없으니 다른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에 대한 그의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함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 3:10).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아니하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선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 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상실하였습니다(롬7:18).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선할 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 청년이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는 믿음의 도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맹목적으로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계명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신대로 살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이 청년이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자 그는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르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8,19).” 예수님은 다섯 계명에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자 청년의 확신에 찬 대답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가복음 10장 20절에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율법 준수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율법을 사랑하였고 율법대로 살고자 애를 쓴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고자 하는 소원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천국 문턱에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들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 영혼은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 문턱에 걸려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은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물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소유를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보다 이 세상에 쌓아두고 평생을 마음 편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재물은 그의 신이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22).
야고보서 4:17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죄는 불법입니다. 또한 죄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계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가 들었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입니다. 나의 생명이 중한 것처럼 남의 생명도 귀중함을 알아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를 볼 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며 친 자매를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계명 해석을 대할 때 우리는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내 마음에 밀려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자기 욕심을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샘 솟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다 팔았습니다. 아니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를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버리면 속이 시원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며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영원히 사느냐가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삶의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죄로 인해서 환란과 곤고가 많은 삶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평강과 자유와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 | 마태복음 19:1-22
요절 | 마태복음 19:21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천국 백성인 우리가 영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혼 생활을 하면서 가정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을 영접함으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질을 희생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특별히 죄로 인해 낙원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갈망하는 그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삶의 질이 높아지자 100세를 사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늙으면 빨리 죽어야겠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이 본심일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부자 청년도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창세기를 공부해보면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영생을 잃어버리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은 누구나 영생을 갈구합니다. 영생은 시간의 계속일뿐만 아니라 변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도 지루한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그렇습니다.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면 이것이 어찌 진정한 영생이겠습니까? 영생은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영생을 간절히 원하는 부자 청년을 도와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기특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그는 관리이고 부자이며 청년입니다. 그는 젊음, 재물, 권력을 다 얻었으니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개 젊으면서 부자이고 권력을 얻게 되면 어떤 종류의 마약을 해보았는지가 그들 세계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재벌 2세들이 마약을 하다 걸려서 검찰 조사를 받는 뉴스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따라 거룩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율법적인 삶으로 인해 그의 영혼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피곤했습니다. 그는 삶에 낙이 없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주님께 영생을 간구한 것을 보면 그의 갈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죄악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원했습니다. 무기력한 삶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원했습니다. 세상에 밀려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분명한 신념과 목적과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마지못해 사는 지겨운 삶이 아니라 기쁨과 활력과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구한 영생은 한마디로 영원하고도 행복한 삶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선한 생활을 했지만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뻥 뚫린 마음과 허무로 인해 삶의 의욕이 없었습니다. 영생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편리합니다. 대부분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즐거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면 깊은 곳에 영생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전3:11). 파스칼은 ‘사람이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생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영생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인생 문제입니다. 이 청년도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배운 대로 율법을 지키므로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율법을 지켰는데도 영생을 누릴 없으니 다른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에 대한 그의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함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 3:10).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아니하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선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 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상실하였습니다(롬7:18).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선할 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 청년이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는 믿음의 도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맹목적으로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계명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신대로 살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이 청년이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자 그는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르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8,19).” 예수님은 다섯 계명에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자 청년의 확신에 찬 대답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가복음 10장 20절에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율법 준수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율법을 사랑하였고 율법대로 살고자 애를 쓴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고자 하는 소원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천국 문턱에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들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 영혼은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 문턱에 걸려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은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물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소유를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보다 이 세상에 쌓아두고 평생을 마음 편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재물은 그의 신이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22).
야고보서 4:17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죄는 불법입니다. 또한 죄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계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가 들었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입니다. 나의 생명이 중한 것처럼 남의 생명도 귀중함을 알아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를 볼 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며 친 자매를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계명 해석을 대할 때 우리는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내 마음에 밀려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자기 욕심을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샘 솟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다 팔았습니다. 아니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를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버리면 속이 시원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며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영원히 사느냐가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삶의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죄로 인해서 환란과 곤고가 많은 삶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평강과 자유와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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