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27m(18:15-35)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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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7 강
말씀 | 마태복음 18:15-35
요절 | 마태복음 18:35
용서하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매일 영접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매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맞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메시지 제목처럼 용서하며 사는 삶입니다.
첫째, 범죄한 형제를 권고하라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여기서 ‘형제’라고 하신 것을 볼 때 같은 믿음의 형제요 신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여 섬겼는데 그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사랑으로 섬긴 것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낍니다. 또는 형제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면 그에 대한 나의 신뢰에 금이 가게 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나를 무시하면 자존감이 상하게 됩니다. 이때 우선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 문제를 다룰 때 조심해서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신중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흉을 보고 소문을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 서로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미움과 판단의 죄를 짓게 됩니다. 공동체의 그릇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권고하라는 말씀은 ‘빛으로 가져오다’, ‘노출시키다’라는 뜻으로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설명해 주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에 대한 영적인 사랑이 필요하고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목자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은밀히 기도해 주며 회개할 때까지 인내로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때는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워 죄를 확증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좀 더 객관적으로 자기 죄 문제를 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도와도 완악하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권징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죄에 대해서 증인의 말을 듣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죄를 지은 형제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출교를 의미합니다. 그는 형제들과 모든 교제를 단절하고 예배에도 참석 할 수 없고, 성만찬에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는 구원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죄를 범한 형제를 돕기 위해서 힘써야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는 정죄할 권한과 용서할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교회의 권위로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권징하면, 하나님께서도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하십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교회는 다시 그를 지체로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교회의 결정을 인정하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징에는 말씀과 함께 합심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모세는 그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다니엘도 그 백성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을 때 그 백성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21일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70년 만에 그들을 회복하신다는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권징의 정신은 사랑이고 권징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지만 온전히 끊어버리고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내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회개할 것만 생각이 납니다. 내가 회개하고 금식하며 죄를 끊고자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세리가 주님께 나아가 기도한 것처럼 가슴을 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신 대속을 믿음으로 자신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용서와 기도를 통해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용서하라.
21,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보통 사람들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서너번은 용서할 마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여 주리이까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정도면 많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죄에 대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매일 용서받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보실 때 매일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시 7:11).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갈으십니다.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의를 행하심으로 이 세상은 그나마 공의롭게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서 왜 우리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에 대해서 보응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심판을 맡겨야 합니다. 또 국가의 사법제도를 세우셔서 이를 대행하십니다. 만약 개인 개인이 죄에 대해서 복수를 한다면 이 세상은 더욱 잔혹하게 변하고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관련된 린다 클링의 시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내 속에 적개심의 불을 지르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친/ 그곳에 그를 남겨 두지 않고/ 내 마음 속에서/ 그를 끌고 내 집으로 데려온다/ 나는 그를 내 방으로 데려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내 생각들 속에도 그는 나를 지배한다/ 그는 내 혀를 통치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채찍을 가하도록 자극한다/ 내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곧 그는/ 내 태도와 행동에 명령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려든다/ 증오의 불이 증오의 목표물보다/ 증오하는 자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것ㅎ이 그 몇 번인가?/ 오 주여, 당신의 식히는 사랑을/ 내 불난 가슴에 부어 주소서/ 제가 품은 모든 상처들을/ 주님 발 앞에 내 놓습니다.” - 린다 클링(Linda Kling)
남아공 대통령이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27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증오와 미움을 감옥에 남겨두고 나가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남아공에 화해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죄가 멀리 떠나가도록 놓아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 속에서 멀리 떠나가도록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은 과거에 그 사람이 행한 죄와 허물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흔히 ‘용서하고 잊으라’(forgive and forget)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저장실과 같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분류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장기 저장실에 입력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나서도 그것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용서한 것이 기억나는 것은 인간 심리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용서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부간에 싸울 때 과거의 상처들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싸움에 기름을 붓습니다. 용서한 것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용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34,35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옥졸들은 고문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20만년 동안 고문을 당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참아 보지 못하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에서 임금과 주인은 하나님을, 일만 달란트(약 6조원, 노동자의 20만년 노임) 빚을 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들은 천국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과거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용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도 우리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유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용서의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영혼이 깊은 어두움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고 기도도 막히게 됩니다. 마음에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용서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혈압이 높고 스트레스도 더 받고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아프면 몸도 아픕니다. 당신을 속인 친구를 그 사람을 용서하셨나요? 부모를 용서하셨나요? 과거에 어리석은 잘못을 한 자신을 용서했나요? 그런 일들을 용서했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노와 복수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라고 합니다. 에베소 4:32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사랑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상업 용어로써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나의 죄 값을 다 갚아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8:15-35
요절 | 마태복음 18:35
용서하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매일 영접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매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맞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메시지 제목처럼 용서하며 사는 삶입니다.
첫째, 범죄한 형제를 권고하라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여기서 ‘형제’라고 하신 것을 볼 때 같은 믿음의 형제요 신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여 섬겼는데 그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사랑으로 섬긴 것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낍니다. 또는 형제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면 그에 대한 나의 신뢰에 금이 가게 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나를 무시하면 자존감이 상하게 됩니다. 이때 우선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 문제를 다룰 때 조심해서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신중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흉을 보고 소문을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 서로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미움과 판단의 죄를 짓게 됩니다. 공동체의 그릇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권고하라는 말씀은 ‘빛으로 가져오다’, ‘노출시키다’라는 뜻으로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설명해 주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에 대한 영적인 사랑이 필요하고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목자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은밀히 기도해 주며 회개할 때까지 인내로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때는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워 죄를 확증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좀 더 객관적으로 자기 죄 문제를 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도와도 완악하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권징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죄에 대해서 증인의 말을 듣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죄를 지은 형제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출교를 의미합니다. 그는 형제들과 모든 교제를 단절하고 예배에도 참석 할 수 없고, 성만찬에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는 구원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죄를 범한 형제를 돕기 위해서 힘써야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는 정죄할 권한과 용서할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교회의 권위로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권징하면, 하나님께서도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하십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교회는 다시 그를 지체로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교회의 결정을 인정하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징에는 말씀과 함께 합심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모세는 그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다니엘도 그 백성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을 때 그 백성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21일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70년 만에 그들을 회복하신다는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권징의 정신은 사랑이고 권징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지만 온전히 끊어버리고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내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회개할 것만 생각이 납니다. 내가 회개하고 금식하며 죄를 끊고자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세리가 주님께 나아가 기도한 것처럼 가슴을 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신 대속을 믿음으로 자신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용서와 기도를 통해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용서하라.
21,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보통 사람들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서너번은 용서할 마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여 주리이까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정도면 많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죄에 대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매일 용서받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보실 때 매일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시 7:11).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갈으십니다.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의를 행하심으로 이 세상은 그나마 공의롭게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서 왜 우리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에 대해서 보응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심판을 맡겨야 합니다. 또 국가의 사법제도를 세우셔서 이를 대행하십니다. 만약 개인 개인이 죄에 대해서 복수를 한다면 이 세상은 더욱 잔혹하게 변하고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관련된 린다 클링의 시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내 속에 적개심의 불을 지르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친/ 그곳에 그를 남겨 두지 않고/ 내 마음 속에서/ 그를 끌고 내 집으로 데려온다/ 나는 그를 내 방으로 데려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내 생각들 속에도 그는 나를 지배한다/ 그는 내 혀를 통치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채찍을 가하도록 자극한다/ 내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곧 그는/ 내 태도와 행동에 명령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려든다/ 증오의 불이 증오의 목표물보다/ 증오하는 자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것ㅎ이 그 몇 번인가?/ 오 주여, 당신의 식히는 사랑을/ 내 불난 가슴에 부어 주소서/ 제가 품은 모든 상처들을/ 주님 발 앞에 내 놓습니다.” - 린다 클링(Linda Kling)
남아공 대통령이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27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증오와 미움을 감옥에 남겨두고 나가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남아공에 화해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죄가 멀리 떠나가도록 놓아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 속에서 멀리 떠나가도록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은 과거에 그 사람이 행한 죄와 허물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흔히 ‘용서하고 잊으라’(forgive and forget)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저장실과 같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분류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장기 저장실에 입력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나서도 그것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용서한 것이 기억나는 것은 인간 심리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용서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부간에 싸울 때 과거의 상처들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싸움에 기름을 붓습니다. 용서한 것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용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34,35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옥졸들은 고문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20만년 동안 고문을 당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참아 보지 못하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에서 임금과 주인은 하나님을, 일만 달란트(약 6조원, 노동자의 20만년 노임) 빚을 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들은 천국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과거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용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도 우리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유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용서의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영혼이 깊은 어두움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고 기도도 막히게 됩니다. 마음에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용서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혈압이 높고 스트레스도 더 받고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아프면 몸도 아픕니다. 당신을 속인 친구를 그 사람을 용서하셨나요? 부모를 용서하셨나요? 과거에 어리석은 잘못을 한 자신을 용서했나요? 그런 일들을 용서했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노와 복수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라고 합니다. 에베소 4:32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사랑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상업 용어로써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나의 죄 값을 다 갚아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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