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26m(17:22-18:14)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이디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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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6 강
말씀 / 마태복음 17:22-18:14
요절 / 마태복음 18:4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18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가장 크다는 말은 비교급으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큰 것이 여러 가지 있는 것 중에서 비교하는 말입니다. 즉 여러 큰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말과 같습니다. 당시 로마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받으며 자신이 가장 힘 쎈 자임을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외부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고 무시함으로 자존심으로 큰 자임을 보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제사 제도를 주관하므로 큰 자임을 보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방금 전 17장에서는 성전세를 걷는 자들이 어깨와 목에 힘주고 베드로에게 ‘너 세금 언제 낼 거야?’ 하며 세금을 추궁하여 걷어갔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세상에 큰 자들은 너무나 많았고, 자신들은 세상 권력과 가진 자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로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많은 분야가 있고, 각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 큰 자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계에서 큰 사람, 학문계에서 큰 사람, 철학에서,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술계에서 거장(巨匠)들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경제나 부동산업계의 큰손, 정치계의 자칭 큰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땅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권력이 있는 사람, 땅을 많이 정복한 사람,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 돈을 많이 번 사람, 베토벤과 같이 예술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먹으로 한국 종로거리를 제패했던 김두한이나 홀로 야수와 같이 만주를 누빈 시라소니가 큰 자인가요?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 트로트에서도 누가 크냐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별의별 분야가 많고 난 사람, 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제가 탁구를 좋아하다보니 탁구계에 거장이 한번 돼보고 싶었으나 막상 탁구 세계로 들어가 보니 나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쎈 고수들이 클럽마다 동네마다 즐비했습니다. 세상은 여러모로 고수들 천지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겠습니까?
1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천국, 즉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제자들은 이 질문을 왜 할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고, 하늘나라 천국을 소망하고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의 나라에 대한 소원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땅에 나라에서는 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권력도 없고, 명망 있는 유명인사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늘나라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하늘나라, 천국을 건설할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기왕에 하늘나라에 들어왔고 예수님의 직접 인터뷰로 선별된 12명의 정규직 멤버이니 이곳에서는 크게 될 소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즉, 세상에서 큰 왕이 되거나 정치가나 사업가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신자가 되었으니 기왕이면 제일 큰 자가 되는 쪽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이것도 가능한 꿈 같았습니다.
우리 유비에프도 한때 자부심이 대단한 교회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UBF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시 UBF가 너무 대단해 보여서 저는 세상 모든 교회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사무엘 목자님이 하셨다는 말씀, 훈련주다가 가망없어 보이는 목자들은 ‘야, 너는 안되겠다. 너는 목자 하지 말고 그냥 나가서 목사나 해라’ 라고 말씀을 하셔서 힘들어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그 말씀이 상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UBF의 훈련에 대해서, 목자라는 타이틀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군이요, 믿음의 용사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UBF에 들어왔으니 이왕이면 유비에프 안에서 큰 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유비에프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로 인정받습니까? 양을 제일 많이 친 사람? 가정교회를 가장 많이 세운 사람? 헌금을 제일 많이 한 사람? 제일 큰 센타를 가진 사람?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아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모든 사람? 어찌하든 모두들 자기가 속한 곳에서 한목소리 좀 내고 큰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에서 힘을 갖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것이 큰 자가 되는 조건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세계에서 이미 큰 자가 되기는 글렀고 이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군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인기도 올라가고 예수님의 능력이 한도 끝도 없이 크시니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인 자기들이 여차하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능가하는 큰 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2, 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고 물었을 때 자신들은 이미 천국 티켓은 따놓은 당상이고,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이키되 어른에서 어린아이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다 커서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어린아이처럼 된단 말입니까? 이 부분은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서 어린아이처럼 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라는 것은 작고 보잘것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존재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진짜 어린아이들도 자기들이 어리다고 무시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엄마 아빠가 어쩌다 한두 마디 잔소리를 반복하면 ‘나도 다 알아요. 내가 뭐 어린애인줄 알아요?’ 하고 되받아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paidion)'으로서, 유아기를 막 지난 시기부터 일곱 살이 안 된 아주 어린 아이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기 힘으로 절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이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를 돌봐주는 부모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무시당하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아이들은 인구조사 할 때 숫자에 포함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어린아이의 어떤 점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어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부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은 자세를 가지고, 호기심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린아이의 특징은 질문이 많다는 것입니다. ‘엄마, 이거 뭐예요?’ 아빠 하늘은 왜 파래요? 하면서 질문합니다. 어떨 때는 열 번 스무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알 때까지, 이해될 때까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질문하는 동기는 엄마 성격테스트 용도 아니고 인내력 훈련용도 아닙니다. 그냥 모르기 때문에, 순수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물어보고 배운 것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 살기 위한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 대해서 잘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땅의 세계보다 더 무한하고 깊이가 한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너무 질문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목자 2세들이 툭하면 ‘나 성경 다 알아’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은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성경 얘기를 하려고 하면 ‘뭐 다 아는 얘기를 또 고리타분하게 꺼내려고 하나’하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땅의 나라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나라에 이민가서 살려고 한다면, 그 나라의 언어부터 시작해서, 역사와 정치, 경제, 사람들의 특성 등등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나라 시민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 천국도 땅의 나라와 똑같겠지 뭐..’ 하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고, 들어가서도 살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다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20년을 살다 돌아왔습니다. 같은 지구상의 나라이고, 같은 사람들인데 정말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다른지 미처 몰랐습니다. 언어와 문화와 생활양식이 너무나 달랐고, 삶의 질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매번 경찰에 돈 뜯기고, 이웃들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울고 웃으며 모든 것을 다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20년 후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내 조국인데도 불구하고 낯설었고, 나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 지우는 데 수년이 걸렸으며 지금도 지우고있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도 내 나라 한국에 대해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땅의 나라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이렇게 어렵고 다양한데 어떻게 모든 것이 전혀 다른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는 한번 척 보면 다 안다는 정말 무모하고 건방진(?)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비굴하고 자기를 굽히고 약자와 같이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듯이 굽신여기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아는 것도 없고, 뭔가 이룬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또한 동시에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아이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성장 속도는 무섭습니다. 한주만 있다가 봐도 아이가 훌쩍 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눌했던 말이 점점 나아지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애가 걷고 뛰기까지 하며, 학습능력이 뛰어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식과 지혜가 계속 늘어납니다. 이렇게 자기를 겸손히 낮추고 배우는 사람은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웁니다. 자기는 부족해서 계속 배우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모르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를 보는 제 삼자들은 그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사람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서도 자라나고, 인격에서도 자라납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풍성해진다는 것이고, 자라나서 점점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부러 크게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큰 사람이 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선 일반적으로 큰 사람들 즉 대가(大家)라고 불리는 사람들, 거장(巨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뭔가를 이미 이루고 성취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사람은 계속 배우며 계속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Learning is never ending!!). 이렇게 끝없이 배우는 자는 결국 그 분야에서 큰 자가 됩니다. 공자는 ‘3인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자기 스승이 있고, 배우고 또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며 배움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이 땅의 것도 늘 새로 배울 것이 많은데 이 땅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는 어떨까요? 하늘나라는 세상의 지식과 법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세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고, 오판하기 쉬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오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도 성경 박사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막12:24)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27절).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산자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보는 큰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많은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자기를 낮추어 성경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겸손하게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배워서 그 지식과 깊이에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그 풍성함에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엡3:19).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은 결국 이 땅에서도 배우고 자라나는 기쁨으로 작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결국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또 6절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5, 6절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는 5절의 어린아이 하나와 6절의 이 작은 자를 동격으로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의 작은 자는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이고, 5절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그 어린아이 즉, 작은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먼저,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며 어린아이와 예수님 자신을 동격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즉, 어린아이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세주로 알고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을 맡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원천이요, 구원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이 갓난아이처럼 연약할지라도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동교센타에도 어린아이가 몇 있습니다. 잠시 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은이에게 엄마인 유진 목자님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전부입니다. 생명의 전부입니다. 에스더에게 한나목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한나 목자는 에스더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한나 목자가 없으면 그 아이는 죽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놀다가도 잠시라도 엄마가 없으면 서럽게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옆에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합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아이로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은이도 에스더도 현재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툭하면 아프고, 병 걸리고, 넘어지고 또 웁니다. 이 아이들을 왜 아프냐고, 왜 넘어지냐고 왜 우냐고 나무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그딴 것도 못하냐고 핀잔하고 나무란다면, 특히 부모가 그런다면 그 연약한 아이들이 어디에서 기댈 곳을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나 신앙의 후배들에게 ‘쯪 쯧, 내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것들은 영 스피릿이 없어..’ ‘요즘 것들은 고마움을 몰라.’ ‘우리는 순교신앙으로 신앙 생활했는데…. 요즘 애들은 영 아니야….’ 이런 마음 자세로 이들을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젊은 세대들을 다 실족시키는 장본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되돌아보면 우리도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리고 젊었을 때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비디오 돌려보면 다 나옵니다.^^. 우리도 실수 많이 했고 허물이 많았습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2세 자녀들이나 현대 지성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그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싸주고 안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어 세상 살아갈 힘을 실어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은이나 에스더를 이렇게 맞아준다면 그것은 곧 가은이 엄마인 유진 목자님과 에스더 엄마인 한나 목자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 엄마가 전부이듯이 엄마에게도 그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자신의 분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현재 이 세상에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어른 인증하는 주민증 다 가지고 있고 원하면 마음대로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모텔같은 곳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이지요? 그럼 여러분은 신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신앙이 장성한 어른들입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리가 속한 세상속의 가치관의 대립속에서 우왕좌왕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한없이 연약한 한 어린아이일지 모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세상의 험한 풍파에 지치거나 나 자신의 연약한 육신과 끊어지지 않는 죄의 소욕으로 인해, 그리고 끊임없이 요구되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요구속에서 한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어리디어린 어린아이 같은 자들일지 모릅니다.
제가 UBF에 와서 거듭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고 목자 생활과 선교사 생활도 20년이 넘게 살아왔지만 저는 여전히 세상 앞에서 연약하고, 제 믿음은 늘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정죄하는 사단의 고소와 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한 마리 연약한 양과 같은 모습입니다. 어느 때는 ‘내가 목자가 맞나? 내가 신자가 맞나?’ 하며 자기 주체성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애늙은이처럼 마치 성경을 다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배우지 않는 모순된 자기를 발견합니다. 또한, 매번 실수하고 부족하다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많고 실수많은 사람들을 영접하고 이해하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작은 것은 무시해도 되고 버려도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의 율법과 기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하자가 발견되는 즉시 사이다 미사일을 쏘아대며 상대방을 박살냅니다. 뚫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비방하여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요즘은 IT의 발달로 인해 손가락을 이용한 각종 SNS상의 욕과 비방으로 인해 많은 연예인들이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악플에 시달려 심지어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끊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손가락에 연자 맷돌을 좀 매달아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손가락이나 남을 비방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입에 연자맷돌을 달아 연약한 자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어린 신자를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잣대로 재고 자신의 입맛의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회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여린 작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소중한 분신임을 기억하고 그 한 사람이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큰 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을 다 고치시고, 모든 귀신을 다 쫓아내시며 바다의 거센 파도와 폭풍우도 잠재울 수 있고, 하늘의 6천 명도 넘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지만, 이 예수님은 그 큰 힘을 세상에서 작은 제자들을 영접해주시고 감당해주시며 그들이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큰소리만 잘 치는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시기심 많은 제자 요한을 가슴에 안고 품어주셨습니다. 믿음을 잃고 엠마오로 행하던 제자들에게도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가슴이 다시 뜨겁게 해주시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힘과 능력을 어리고 연약한 아이같은 제자들을 영접해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토록 도와주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바로 그 옆에서 그의 장단점 모든 것을 다 아는 그 한 사람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바로 옆의 동역자에게, 같이 있는 아들과 딸들에게, 바로 옆의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하고 큰 자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영접해주며 사랑과 인내로 섬겨주는 자, 바로 그런 자가 진정으로 큰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저 자신이 예수님의 소중한 한 작은 아이임을 기억해 봅니다. 엄마가 전부인 아이처럼, 늘 엄마만 바라보는 아이처럼 예수님을 전부로 알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매순간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가다가 누가 혹시 믿음을 잃고 방황하거나 힘들어할 때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작은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그 크기를 알고 그 안에서 자라나기를 소원해 봅니다. 내가 이룬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리며 배우고 또 익히며 매일 매일 배우고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작은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오늘 하루에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까? 오늘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실까? 기대하며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배운 것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해 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성장하고 자라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 / 마태복음 17:22-18:14
요절 / 마태복음 18:4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18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가장 크다는 말은 비교급으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큰 것이 여러 가지 있는 것 중에서 비교하는 말입니다. 즉 여러 큰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말과 같습니다. 당시 로마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받으며 자신이 가장 힘 쎈 자임을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외부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고 무시함으로 자존심으로 큰 자임을 보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제사 제도를 주관하므로 큰 자임을 보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방금 전 17장에서는 성전세를 걷는 자들이 어깨와 목에 힘주고 베드로에게 ‘너 세금 언제 낼 거야?’ 하며 세금을 추궁하여 걷어갔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세상에 큰 자들은 너무나 많았고, 자신들은 세상 권력과 가진 자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로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많은 분야가 있고, 각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 큰 자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계에서 큰 사람, 학문계에서 큰 사람, 철학에서,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술계에서 거장(巨匠)들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경제나 부동산업계의 큰손, 정치계의 자칭 큰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땅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권력이 있는 사람, 땅을 많이 정복한 사람,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 돈을 많이 번 사람, 베토벤과 같이 예술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먹으로 한국 종로거리를 제패했던 김두한이나 홀로 야수와 같이 만주를 누빈 시라소니가 큰 자인가요?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 트로트에서도 누가 크냐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별의별 분야가 많고 난 사람, 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제가 탁구를 좋아하다보니 탁구계에 거장이 한번 돼보고 싶었으나 막상 탁구 세계로 들어가 보니 나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쎈 고수들이 클럽마다 동네마다 즐비했습니다. 세상은 여러모로 고수들 천지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겠습니까?
1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천국, 즉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제자들은 이 질문을 왜 할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고, 하늘나라 천국을 소망하고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의 나라에 대한 소원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땅에 나라에서는 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권력도 없고, 명망 있는 유명인사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늘나라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하늘나라, 천국을 건설할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기왕에 하늘나라에 들어왔고 예수님의 직접 인터뷰로 선별된 12명의 정규직 멤버이니 이곳에서는 크게 될 소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즉, 세상에서 큰 왕이 되거나 정치가나 사업가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신자가 되었으니 기왕이면 제일 큰 자가 되는 쪽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이것도 가능한 꿈 같았습니다.
우리 유비에프도 한때 자부심이 대단한 교회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UBF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시 UBF가 너무 대단해 보여서 저는 세상 모든 교회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사무엘 목자님이 하셨다는 말씀, 훈련주다가 가망없어 보이는 목자들은 ‘야, 너는 안되겠다. 너는 목자 하지 말고 그냥 나가서 목사나 해라’ 라고 말씀을 하셔서 힘들어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그 말씀이 상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UBF의 훈련에 대해서, 목자라는 타이틀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군이요, 믿음의 용사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UBF에 들어왔으니 이왕이면 유비에프 안에서 큰 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유비에프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로 인정받습니까? 양을 제일 많이 친 사람? 가정교회를 가장 많이 세운 사람? 헌금을 제일 많이 한 사람? 제일 큰 센타를 가진 사람?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아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모든 사람? 어찌하든 모두들 자기가 속한 곳에서 한목소리 좀 내고 큰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에서 힘을 갖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것이 큰 자가 되는 조건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세계에서 이미 큰 자가 되기는 글렀고 이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군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인기도 올라가고 예수님의 능력이 한도 끝도 없이 크시니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인 자기들이 여차하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능가하는 큰 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2, 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고 물었을 때 자신들은 이미 천국 티켓은 따놓은 당상이고,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이키되 어른에서 어린아이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다 커서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어린아이처럼 된단 말입니까? 이 부분은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서 어린아이처럼 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라는 것은 작고 보잘것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존재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진짜 어린아이들도 자기들이 어리다고 무시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엄마 아빠가 어쩌다 한두 마디 잔소리를 반복하면 ‘나도 다 알아요. 내가 뭐 어린애인줄 알아요?’ 하고 되받아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paidion)'으로서, 유아기를 막 지난 시기부터 일곱 살이 안 된 아주 어린 아이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기 힘으로 절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이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를 돌봐주는 부모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무시당하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아이들은 인구조사 할 때 숫자에 포함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어린아이의 어떤 점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어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부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은 자세를 가지고, 호기심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린아이의 특징은 질문이 많다는 것입니다. ‘엄마, 이거 뭐예요?’ 아빠 하늘은 왜 파래요? 하면서 질문합니다. 어떨 때는 열 번 스무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알 때까지, 이해될 때까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질문하는 동기는 엄마 성격테스트 용도 아니고 인내력 훈련용도 아닙니다. 그냥 모르기 때문에, 순수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물어보고 배운 것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 살기 위한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 대해서 잘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땅의 세계보다 더 무한하고 깊이가 한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너무 질문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목자 2세들이 툭하면 ‘나 성경 다 알아’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은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성경 얘기를 하려고 하면 ‘뭐 다 아는 얘기를 또 고리타분하게 꺼내려고 하나’하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땅의 나라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나라에 이민가서 살려고 한다면, 그 나라의 언어부터 시작해서, 역사와 정치, 경제, 사람들의 특성 등등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나라 시민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 천국도 땅의 나라와 똑같겠지 뭐..’ 하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고, 들어가서도 살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다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20년을 살다 돌아왔습니다. 같은 지구상의 나라이고, 같은 사람들인데 정말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다른지 미처 몰랐습니다. 언어와 문화와 생활양식이 너무나 달랐고, 삶의 질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매번 경찰에 돈 뜯기고, 이웃들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울고 웃으며 모든 것을 다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20년 후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내 조국인데도 불구하고 낯설었고, 나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 지우는 데 수년이 걸렸으며 지금도 지우고있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도 내 나라 한국에 대해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땅의 나라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이렇게 어렵고 다양한데 어떻게 모든 것이 전혀 다른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는 한번 척 보면 다 안다는 정말 무모하고 건방진(?)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비굴하고 자기를 굽히고 약자와 같이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듯이 굽신여기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아는 것도 없고, 뭔가 이룬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또한 동시에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아이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성장 속도는 무섭습니다. 한주만 있다가 봐도 아이가 훌쩍 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눌했던 말이 점점 나아지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애가 걷고 뛰기까지 하며, 학습능력이 뛰어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식과 지혜가 계속 늘어납니다. 이렇게 자기를 겸손히 낮추고 배우는 사람은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웁니다. 자기는 부족해서 계속 배우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모르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를 보는 제 삼자들은 그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사람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서도 자라나고, 인격에서도 자라납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풍성해진다는 것이고, 자라나서 점점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부러 크게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큰 사람이 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선 일반적으로 큰 사람들 즉 대가(大家)라고 불리는 사람들, 거장(巨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뭔가를 이미 이루고 성취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사람은 계속 배우며 계속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Learning is never ending!!). 이렇게 끝없이 배우는 자는 결국 그 분야에서 큰 자가 됩니다. 공자는 ‘3인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자기 스승이 있고, 배우고 또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며 배움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이 땅의 것도 늘 새로 배울 것이 많은데 이 땅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는 어떨까요? 하늘나라는 세상의 지식과 법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세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고, 오판하기 쉬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오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도 성경 박사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막12:24)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27절).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산자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보는 큰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많은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자기를 낮추어 성경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겸손하게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배워서 그 지식과 깊이에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그 풍성함에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엡3:19).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은 결국 이 땅에서도 배우고 자라나는 기쁨으로 작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결국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또 6절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5, 6절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는 5절의 어린아이 하나와 6절의 이 작은 자를 동격으로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의 작은 자는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이고, 5절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그 어린아이 즉, 작은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먼저,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며 어린아이와 예수님 자신을 동격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즉, 어린아이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세주로 알고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을 맡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원천이요, 구원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이 갓난아이처럼 연약할지라도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동교센타에도 어린아이가 몇 있습니다. 잠시 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은이에게 엄마인 유진 목자님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전부입니다. 생명의 전부입니다. 에스더에게 한나목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한나 목자는 에스더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한나 목자가 없으면 그 아이는 죽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놀다가도 잠시라도 엄마가 없으면 서럽게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옆에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합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아이로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은이도 에스더도 현재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툭하면 아프고, 병 걸리고, 넘어지고 또 웁니다. 이 아이들을 왜 아프냐고, 왜 넘어지냐고 왜 우냐고 나무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그딴 것도 못하냐고 핀잔하고 나무란다면, 특히 부모가 그런다면 그 연약한 아이들이 어디에서 기댈 곳을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나 신앙의 후배들에게 ‘쯪 쯧, 내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것들은 영 스피릿이 없어..’ ‘요즘 것들은 고마움을 몰라.’ ‘우리는 순교신앙으로 신앙 생활했는데…. 요즘 애들은 영 아니야….’ 이런 마음 자세로 이들을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젊은 세대들을 다 실족시키는 장본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되돌아보면 우리도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리고 젊었을 때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비디오 돌려보면 다 나옵니다.^^. 우리도 실수 많이 했고 허물이 많았습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2세 자녀들이나 현대 지성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그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싸주고 안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어 세상 살아갈 힘을 실어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은이나 에스더를 이렇게 맞아준다면 그것은 곧 가은이 엄마인 유진 목자님과 에스더 엄마인 한나 목자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 엄마가 전부이듯이 엄마에게도 그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자신의 분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현재 이 세상에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어른 인증하는 주민증 다 가지고 있고 원하면 마음대로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모텔같은 곳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이지요? 그럼 여러분은 신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신앙이 장성한 어른들입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리가 속한 세상속의 가치관의 대립속에서 우왕좌왕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한없이 연약한 한 어린아이일지 모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세상의 험한 풍파에 지치거나 나 자신의 연약한 육신과 끊어지지 않는 죄의 소욕으로 인해, 그리고 끊임없이 요구되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요구속에서 한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어리디어린 어린아이 같은 자들일지 모릅니다.
제가 UBF에 와서 거듭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고 목자 생활과 선교사 생활도 20년이 넘게 살아왔지만 저는 여전히 세상 앞에서 연약하고, 제 믿음은 늘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정죄하는 사단의 고소와 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한 마리 연약한 양과 같은 모습입니다. 어느 때는 ‘내가 목자가 맞나? 내가 신자가 맞나?’ 하며 자기 주체성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애늙은이처럼 마치 성경을 다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배우지 않는 모순된 자기를 발견합니다. 또한, 매번 실수하고 부족하다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많고 실수많은 사람들을 영접하고 이해하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작은 것은 무시해도 되고 버려도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의 율법과 기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하자가 발견되는 즉시 사이다 미사일을 쏘아대며 상대방을 박살냅니다. 뚫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비방하여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요즘은 IT의 발달로 인해 손가락을 이용한 각종 SNS상의 욕과 비방으로 인해 많은 연예인들이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악플에 시달려 심지어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끊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손가락에 연자 맷돌을 좀 매달아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손가락이나 남을 비방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입에 연자맷돌을 달아 연약한 자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어린 신자를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잣대로 재고 자신의 입맛의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회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여린 작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소중한 분신임을 기억하고 그 한 사람이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큰 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을 다 고치시고, 모든 귀신을 다 쫓아내시며 바다의 거센 파도와 폭풍우도 잠재울 수 있고, 하늘의 6천 명도 넘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지만, 이 예수님은 그 큰 힘을 세상에서 작은 제자들을 영접해주시고 감당해주시며 그들이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큰소리만 잘 치는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시기심 많은 제자 요한을 가슴에 안고 품어주셨습니다. 믿음을 잃고 엠마오로 행하던 제자들에게도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가슴이 다시 뜨겁게 해주시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힘과 능력을 어리고 연약한 아이같은 제자들을 영접해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토록 도와주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바로 그 옆에서 그의 장단점 모든 것을 다 아는 그 한 사람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바로 옆의 동역자에게, 같이 있는 아들과 딸들에게, 바로 옆의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하고 큰 자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영접해주며 사랑과 인내로 섬겨주는 자, 바로 그런 자가 진정으로 큰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저 자신이 예수님의 소중한 한 작은 아이임을 기억해 봅니다. 엄마가 전부인 아이처럼, 늘 엄마만 바라보는 아이처럼 예수님을 전부로 알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매순간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가다가 누가 혹시 믿음을 잃고 방황하거나 힘들어할 때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작은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그 크기를 알고 그 안에서 자라나기를 소원해 봅니다. 내가 이룬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리며 배우고 또 익히며 매일 매일 배우고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작은 아이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오늘 하루에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까? 오늘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실까? 기대하며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배운 것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해 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성장하고 자라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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