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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23)15:1-28)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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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1회 작성일 20-08-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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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3 강
말씀 | 마태복음 15:1-28
요절 | 마태복음 15:19,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온라인 여름수양회를 시도하고 은혜 가운데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축복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청소를 하지 않으면 방이 더러워지고 벌레가 생깁니다. 청소를 해도 자주 주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다시 더러워집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죄를 짓는데 그때그때 죄사함을 받고 씻지 아니하면 마음이 죄에 무디어 집니다. 우리가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우리는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자 종교지도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따졌습니다.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한 것을 보고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이것은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은 헌물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말합니다. 장로들이 이 제도를 만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지만, 빚을 지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 물건을 압류당하면 서원을 갚을 수가 없는 경우를 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것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고르반 제도를 악용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기 때문에 부모님은 안 섬겨도 된다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 실제로는 하나님도 잘 안 섬기고 부모님도 안 섬겼습니다. 빚을 진 후에 돈이 생겨도 빚을 안 갚고 ‘고르반’하면서 이 돈은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이용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보다 자기 의를 쌓는 일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가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행하는 것입니다(롬12:1,2).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지만 진심을 드릴 때 이를 받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찬양을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받으시고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드레가 드린 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인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과 사랑을 받으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고 진심을 드리는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을 구분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신 목적은 먹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인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함으로 바리새인들이 화를 낼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느 정도 존중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사람이 심은 것이지 하나님이 심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전통이라도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전통보다 항상 앞세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베드로가 전통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조근조근 설명해 주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모든 음식은 먹으면 소화되어서 배설물로 나옵니다. 음식으로 인해서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죄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악한 생각은 죄를 짓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거룩하며 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선을 추구하던 마음이 죄로 향하는 부패한 심령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렘17:9).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선한 생각을 하기 보다는 악한 생각, 음란한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악한 생각에서 악한 행동들이 나옵니다. 살인하고, 사기치고, 간음하고, 비방하는 행동이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사람을 궁극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악한 마음입니다.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죄를 자백할 때 깨끗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9:13,14은 말씀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는 죄를 깨끗하게 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회개하고 이를 믿는 사람 안에 역사하십니다. 그는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둘째,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예수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그녀는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려 고통하는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녀가 ‘소리 질렀다’는 동사는 미완료시제로서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주 두로와 시돈 지역을 방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귀신들린 딸을 영영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자 제자들이 민망했는지 그를 보내라고 요청합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온 자들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몰골이 추한 나병 환자도 치료해주셨고, 창기와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영접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종종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침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침묵하기도 하고, 욥과 같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침묵하십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시지만 고난 중에 내버려두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영적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회의에 빠지고도 합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반발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더욱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고 진실한 믿음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간청에 침묵하신 이유도 여자의 믿음을 단련하고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에 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먹이고자 하다가 많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을 다윗의 자손, 주라고 부르는 이방 여인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말을 들으시고 그 시험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사랑스럽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굉장히 모욕적으로 들립니다. 배고픈 자녀가 있는데 그 떡을 취해서 개에게 던질 어머니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머니의 입장에서 깊이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이 여자는 참으로 마음에 여우가 있습니다. 이런 여유 속에서 지혜로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여인의 말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시고도 남을 떡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가 놀란 것이 아니라 여자의 대답에 예수님이 놀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의 주권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여인은 주님이 나를 어떤 자로 취급하시든,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시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욥을 보면 그가 아끼던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그를 계속해서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심지어 아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는 개 정도가 아니라 벌레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시고 그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연단하십니다. 이때 주님의 선한 주권을 영접하고 연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상처를 받지 않고 단지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딸이 능히 낫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부스러기든, 상 위의 떡이든, 상 아래 떡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런 겸손하고 지혜로운 말에 예수님이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여자의 큰 믿음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를 통해서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이 완전히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겼습니다. 거기다가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하는 딸은 더욱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행한 것도 없고 무슨 의를 행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을 깨끗하게 치료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가를 배웠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인들이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그 믿음을 보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을 말씀과 그의 보혈과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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