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16강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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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6 강
말씀 | 요한복음 13:1-38
요절 |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간단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십계명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말이 아니라 실천할 때 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이요 스승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기는 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통해서 섬김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여 용서하고 허물을 감당해줄 때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강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모양의 갈등을 서로 사랑함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1-20). 보통 사람들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목록들을 정하여 실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버킷 리스트로 하지요?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여행을 한다든지, 가족들에게 못 다한 사랑을 한다든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다든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 외국어 배우기, 악기 배우기 등등을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전에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치스럽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제자들의 위로나 받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가 마지막이 되니 갑자기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그 사랑이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을 통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주십니다. 13장부터 나오는 모든 것의 동기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을 씻기신 것, 성령에 대한 약속, 대제사장적 기도, 십자가까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13).
끝까지 사랑할 때 참다운 사랑이 됩니다. 마귀는 유다에게 배신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유다가 배신을 꾀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끝까지 하는 사랑은 더욱 위대합니다. 보통 배신을 당할 것 같으면 미리 차버리든지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리석을 정도로 자기를 배신할 생각을 품은 자, 자기를 부인하고 떠나버릴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요 순수한 사랑이요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셨습니까?
유대인의 풍습은 식사 전에 종들이 손님들의 발을 물로 씻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는 어느 하나 나서서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자기를 섬겨줄 것인가 기대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낮아져서 종노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발 냄새를 피우며 앉아 있었습니다. 중동에서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발을 씻지 않으면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특히 좁은 다락방에 열세 명이 모여 앉아 있으니 냄새가 더욱 고약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때로 우리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은 먼저 인사 받고, 먼저 대접 받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것이 원망과 불평과 미움으로 자라납니다.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손해 의식을 느끼고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이렇게 대가를 바라고 사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나를 섬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주님께서 주인이요 선생으로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종들이 하는 일을 행하심으로 섬김의 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인데 주님은 친히 제자들을 섬기심으로 진정한 위대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큰 자가 섬기는 것입니다. 어린 사람들은 섬김만 받습니다. 우리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표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사랑의 관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요 위대한 삶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기는 삶은 수고와 때로는 희생이 따르지만 사실은 가장 복된 삶입니다. 나의 작은 사랑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유익을 준다면 값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섬김을 실천함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제자들의 공동체는 서로 섬김으로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새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하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옛 계명의 기초 위에 새롭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구약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옛 계명과 새 계명을 비교해 보면 첫째, 사랑의 기준이 다릅니다. 옛 계명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합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선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 계명에서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어떤 허물과 약점에도 끝까지 사랑하셨고, 결국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서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의 관계성이 다릅니다. 옛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일방적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서로 사랑입니다. 상호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권고 사항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할 계명입니다. 제자들이 새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풍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풍성함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어떤 공동체이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법대로 하면 사회는 냉정해집니다. 사랑이 없이 율법과 논리만 있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 사는 곳이 삭막해집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신앙생활은 목표를 향해서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신앙이라고 해서 혼자서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옆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감당해 주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우리 모임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 협력과 돌봄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섬겨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아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실상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 연약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3:1-38
요절 |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간단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십계명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말이 아니라 실천할 때 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이요 스승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기는 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통해서 섬김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여 용서하고 허물을 감당해줄 때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강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모양의 갈등을 서로 사랑함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1-20). 보통 사람들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목록들을 정하여 실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버킷 리스트로 하지요?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여행을 한다든지, 가족들에게 못 다한 사랑을 한다든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다든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 외국어 배우기, 악기 배우기 등등을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전에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치스럽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제자들의 위로나 받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가 마지막이 되니 갑자기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그 사랑이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을 통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주십니다. 13장부터 나오는 모든 것의 동기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을 씻기신 것, 성령에 대한 약속, 대제사장적 기도, 십자가까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13).
끝까지 사랑할 때 참다운 사랑이 됩니다. 마귀는 유다에게 배신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유다가 배신을 꾀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끝까지 하는 사랑은 더욱 위대합니다. 보통 배신을 당할 것 같으면 미리 차버리든지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리석을 정도로 자기를 배신할 생각을 품은 자, 자기를 부인하고 떠나버릴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요 순수한 사랑이요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셨습니까?
유대인의 풍습은 식사 전에 종들이 손님들의 발을 물로 씻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는 어느 하나 나서서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자기를 섬겨줄 것인가 기대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낮아져서 종노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발 냄새를 피우며 앉아 있었습니다. 중동에서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발을 씻지 않으면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특히 좁은 다락방에 열세 명이 모여 앉아 있으니 냄새가 더욱 고약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때로 우리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은 먼저 인사 받고, 먼저 대접 받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것이 원망과 불평과 미움으로 자라납니다.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손해 의식을 느끼고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이렇게 대가를 바라고 사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나를 섬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주님께서 주인이요 선생으로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종들이 하는 일을 행하심으로 섬김의 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인데 주님은 친히 제자들을 섬기심으로 진정한 위대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큰 자가 섬기는 것입니다. 어린 사람들은 섬김만 받습니다. 우리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표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사랑의 관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요 위대한 삶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기는 삶은 수고와 때로는 희생이 따르지만 사실은 가장 복된 삶입니다. 나의 작은 사랑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유익을 준다면 값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섬김을 실천함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제자들의 공동체는 서로 섬김으로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새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하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옛 계명의 기초 위에 새롭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구약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옛 계명과 새 계명을 비교해 보면 첫째, 사랑의 기준이 다릅니다. 옛 계명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합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선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 계명에서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어떤 허물과 약점에도 끝까지 사랑하셨고, 결국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서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의 관계성이 다릅니다. 옛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일방적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서로 사랑입니다. 상호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권고 사항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할 계명입니다. 제자들이 새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풍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풍성함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어떤 공동체이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법대로 하면 사회는 냉정해집니다. 사랑이 없이 율법과 논리만 있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 사는 곳이 삭막해집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신앙생활은 목표를 향해서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신앙이라고 해서 혼자서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옆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감당해 주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우리 모임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 협력과 돌봄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섬겨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아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실상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 연약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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