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9강.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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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히브리서 제 9 강
말씀 | 히브리서 10:19-39
요절 | 히브리서 10:22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지난 주 까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한 교리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부터는 히브리서의 실천편으로써 예수님의 온전한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신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것과 또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음의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19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19). 구약시대에는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갈 수 있었으며, 대제사장도 1년 중 대속죄일에 한번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누구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구약의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지성소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천으로 만든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죄의 장벽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죄의 장벽은 허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막15:37,38).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열어 놓으신 그 길을 ‘새로운 살 길’(a new and living way)(NIV)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살 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은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 하나님이 계신 하늘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새로운 길, 하나님께 이르는 하늘고속도로입니다. 이 길은 또한 살 길입니다. 우리가 그 길로 들어갈 때 살게 되는 길(living way)이요 생명을 얻게 되는 길(life-giving way(NLT))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 되십니다(요14:6).
21,22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은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참 마음(sincere heart)이란 이중적이거나 외식적인 마음이 아닌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full assurance of faith)이란 물질이나 재능이나 능력 등 어떤 인간적인 것도, 자기 의와 성실 등 어떤 의로운 신앙적 행위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나라의 참 기쁨과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사랑과 즐거움과 화평과 거룩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23, 24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믿는 도리’는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모시고 이제 더 이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공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와 함께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혼자 있으면 시험을 받을 때에 연약해져서 믿음을 잃기가 쉽습니다. 사탄은 연약해진 사람, 피곤해진 사람, 혼자 우울하게 지내는 사람, 병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한 줄이면 쉽게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장작불은 모아 놓아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나 잘 타던 나무도 흩어놓으면 연기를 내면서 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신자는 모여야 합니다. 모이면 형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기도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셋째,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다루는 죄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면서 연약하여 범하는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deliberately keep on sinning(NIV)’ 이는 예수님을 믿은 후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나 회교나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배교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믿다가 예수 믿는 것이 너무 고리타분하게 느껴져서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 물질과 쾌락과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게 됩니다(27).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하실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시면서 동시에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역겨워하시면 독생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진노를 그에게 쏟아부으셔야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값없이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큰 값을 지불하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짓는 것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주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 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심판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기 쉽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타협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안다면 이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전날에 히브리 성도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복음 때문에 갇힌 자를 동정하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고난을 받을 때 담대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확신에서 나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할 때, 우리는 물질적인 손해와 세상 권세들과 박해 앞에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담대함을 버리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늘의 큰 상급을 얻게 해줄 것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38,39절을 보십시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여기서 뒤로 물러가는 것과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은 힘들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타협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은 자꾸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뒤로 물러가도록 종용합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삶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입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는 삶입니다(잠16:24). 이렇게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하고 전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이런 자와 함께 하시며 그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가 어떤 시련과 핍박과 역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배우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문제들을 아뢰게 하시고 또 친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히브리서 10:19-39
요절 | 히브리서 10:22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지난 주 까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한 교리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부터는 히브리서의 실천편으로써 예수님의 온전한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신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것과 또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음의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19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19). 구약시대에는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갈 수 있었으며, 대제사장도 1년 중 대속죄일에 한번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누구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구약의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지성소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천으로 만든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죄의 장벽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죄의 장벽은 허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막15:37,38).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열어 놓으신 그 길을 ‘새로운 살 길’(a new and living way)(NIV)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살 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은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 하나님이 계신 하늘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새로운 길, 하나님께 이르는 하늘고속도로입니다. 이 길은 또한 살 길입니다. 우리가 그 길로 들어갈 때 살게 되는 길(living way)이요 생명을 얻게 되는 길(life-giving way(NLT))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 되십니다(요14:6).
21,22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은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참 마음(sincere heart)이란 이중적이거나 외식적인 마음이 아닌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full assurance of faith)이란 물질이나 재능이나 능력 등 어떤 인간적인 것도, 자기 의와 성실 등 어떤 의로운 신앙적 행위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나라의 참 기쁨과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사랑과 즐거움과 화평과 거룩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23, 24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믿는 도리’는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모시고 이제 더 이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공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와 함께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혼자 있으면 시험을 받을 때에 연약해져서 믿음을 잃기가 쉽습니다. 사탄은 연약해진 사람, 피곤해진 사람, 혼자 우울하게 지내는 사람, 병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한 줄이면 쉽게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장작불은 모아 놓아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나 잘 타던 나무도 흩어놓으면 연기를 내면서 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신자는 모여야 합니다. 모이면 형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기도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셋째,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다루는 죄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면서 연약하여 범하는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deliberately keep on sinning(NIV)’ 이는 예수님을 믿은 후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나 회교나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배교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믿다가 예수 믿는 것이 너무 고리타분하게 느껴져서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 물질과 쾌락과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게 됩니다(27).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하실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시면서 동시에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역겨워하시면 독생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진노를 그에게 쏟아부으셔야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값없이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큰 값을 지불하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짓는 것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주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 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심판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기 쉽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타협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안다면 이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전날에 히브리 성도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복음 때문에 갇힌 자를 동정하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고난을 받을 때 담대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확신에서 나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할 때, 우리는 물질적인 손해와 세상 권세들과 박해 앞에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담대함을 버리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늘의 큰 상급을 얻게 해줄 것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38,39절을 보십시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여기서 뒤로 물러가는 것과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은 힘들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타협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은 자꾸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뒤로 물러가도록 종용합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삶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입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는 삶입니다(잠16:24). 이렇게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하고 전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이런 자와 함께 하시며 그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가 어떤 시련과 핍박과 역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배우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문제들을 아뢰게 하시고 또 친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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