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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23 강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행24:1-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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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50회 작성일 16-10-02 08:50

본문

2016년 사도행전 제 23 강
말씀 | 사도행전 24:1-25:12
요절 | 사도행전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 사람과 이 땅을 향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바울 외에는 모두 가 이 땅을 향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 사도바울을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법정에 고소하고 그를 없이하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들 앞에서 그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변론하고 그를 고소한 자들과 그를 재판하고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나의 소망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땅을 향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분명히 붙잡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1절을 봅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된 지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법을 잘 알고 있던 변호사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국제변호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황금의 입”이라 불리울만큼 아주 변론을 잘하는 변호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덕분에 많은 사건을 수임하여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많은 돈을 주고 사서 사도바울을 고발하고자 한 것입니다.

고발이 접수된 이상 총독 벨릭스는 이 사건에 대한 심의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총독의 재판정에 불려 나오게 되었고 변호사 더둘로는 사도바울을 고발하는 이유를 발언하게 됩니다. 3,4절을 봅시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더둘로는 먼저 총독의 선정을 치하하고 그의 발언을 관용하여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총독의 마음을 얻어 재판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유리하게 끌어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많은 재판을 경험한 더불로만의 계산된 고도의 심리전술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사도바울을 어떠한 이유로 고발하고 있습니까? 5-8절을 봅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그는 사도바울을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하고 또 성전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런 그를 그대로 두면 유대인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그의 고발한 내용 중에는 실상 사실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시 기독교의 우두머리도 아니였고 성전을 더럽힌 일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소요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날조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더둘로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재판에 참가한 유대인들은 일제히 이 말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로마법정에서는 종교에 관한 문제는 다루지 않는 것을 알고 그를 교묘하게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고 있는 정치범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총독 빌라도를 위협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외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사도바울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고발하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발언을 들은 총독 벨릭스는 사도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변론에서 그가 예루살렘에 온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선동한 일이 없었다는 것과 그들이 이단이라 하지만 그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음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소망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성전에서 재물을 드리려 했음과 공회 앞에서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고 말한 것 말고는 지은 죄가 없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이 도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재판을 연기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이 그를 시기하여 무고히 고발하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바울을 바로 석방하지 않습니다. 그를 석방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 다음에 총독 벨릭스가 재판을 열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는 수일 후에 사도바울을 따로 불러서 그의 아내 두루실라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습니다. 그때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노예 출신의 신분이었습니다. 로마 정부가 노예를 해방하고 해방된 노예 출신을 관직에 등용할 때에, 그 형제 발라가 등용되어 큰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발라가 황제에게 간청하여 벨릭스를 유대 총독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드루실라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며 헤롯대왕의 손녀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메사라스 나라의 아지스왕과 결혼한 유부녀였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드루실라에게 반하여 마술사 시몬을 보내어 그녀를 설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유대교인이었으나, 율법을 어기고 남편과 이혼하고 벨릭스의 세번째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권력과 부의 정상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통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멸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다음의 단계인 회심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돌려보내고 다음에 듣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에게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에게 돈을 받을까하여 가끔씩 그를 부르곤 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도 회개할 기회를 얻고도 무시한 벨릭스는 결국 유대인 총독으로 부임한지 8년 만에 파면당하고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이 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총독 벨릭스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진 자와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우리의 삶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지 양심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들은 최대한 인생을 즐기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최대한 섬김을 받고 탐욕을 좇아 본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총독 벨릭스의 삶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보다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믿는다고 하지만 소망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크리스찬, 세상적인 크리스찬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변호사 더둘로와 사도바울에 재판에 참가한 유대인들입니다. 실상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으며 살고자 하는 크리스찬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교인은 많으나 신자는 적고 신자는 많으나 제자는 적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 혹은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 실상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하나일 수 없듯이 우리의 소망은 어느 하나에 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이 소망에 관한 질문을 할 때 대답할 분명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실상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땅에 소망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 즉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이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JBF 친구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줄 압니다. 어떤 친구는 의사가 될려고 하고 어떤 친구는 발명가가 될려고 하고 어떤 친구는 교수가 될려고 하고 어떤 친구는 휼륭한 작가가 될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든 그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한 소망을 갖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갖고 의사가 된다면 그 의사는 돈을 많이 버는 의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의사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더둘로처럼 돈과 명성을 얻은 변호사가 될지는 모르지만 약자들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변호사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우리의 소망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소망인 것입니다.

행24:27절을 봅시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사도바울을 통해 여러차례 복음을 듣고도 회개에 이르지 못한 총독 벨릭스는 폭정과 악한 일을 일삼았다가 이를 참다 못한 유대인들의 고소로 황제에 의해 유대 총독에서 파면되고 베스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만일 벨릭스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했다면 이 땅을 향한 그의 소망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바뀌었더라면 그는 이렇게 파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년이 그토록 비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 때문에 비록 사슬의 매인 죄수의 몸이었지만 그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마침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사도바울의 삶을 흠모하여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그 소망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막과 같습니다.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떽쥐베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이 글귀를 보고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사막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다는 믿음, 그 우물을 발견할 것이라는 소망, 그러한 믿음과 소망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사랑, 믿음, 소망, 사랑은 늘 아름답다.” 사막과 같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우물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그를 믿으며 그를 바라며 그 믿음과 소망을 전하는 사랑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세상도 아름다워집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난 주 주일메시지를 들으며 적어놓은 시 한편을 나누고 메시지를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증언을 묵상하며 적은 글입니다.

<죽은 자의 소망>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나는 오늘을 최대한 즐길 것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무시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섬김을 받을 것이다.
나는 철저히 내 탐욕을 좇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내 본성에 충실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게 하시니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소망하나니
그러한 믿음과 소망을 전해주신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우리 JBF 친구들이 모두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믿으며 그 안에서 죽은 자의 소망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힘쓰는 크리스찬, 이 땅에 속한 크리스찬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크리스찬으로 승리하는 크리스찬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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