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강.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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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2 강
말씀 | 누가복음 13:10-35
요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매임에서 푸는 안식일(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귀신 들려”라는 단어는 약하게 하는 영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운명주의, 마음의 상처, 피해의식, 미움 등으로 마음이 꼬부라지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꿋꿋하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고 개척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단에 매어 마음이 꼬부라져서 기를 펴지 못하고 죄에 종노릇하며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여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꼬부라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날 때 펴지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시는 분입니다(4:18). 예수님은 꼬부라진 인생을 펴주는 분이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꼬부라진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학생들이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감으로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말했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그는 안식일 법에 매여 마음이 꼬부라져 있었고 그의 생각도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 왜 합당한가 말씀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들은 이 여인을 볼 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는가 하며 멸시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영접하셨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에 짐승을 외양간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열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여인을 하루 더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느냐 하시며 그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권세에 매인 사람, 실패에 매인 사람, 운명에 매인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와서 매인 것이 풀어지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고 모험하며 개척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나음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비유(18-21).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19).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지만 자라면 3.5미터까지 자랍니다.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겨자 나무에 깃들이는 새들은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미약하게 시작에서 지구를 덮고 이천년을 지내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한 번에 반죽하기 알맞은 양으로서 약 150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의 빵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누룩과 같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가족을 변화시키고 친구들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오늘날 복음 역사가 많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 가운데서도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죄문제와 우리 공동체의 문제, 나의 연약함과 죄문제에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가운데서도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불신의 시대, 음란한 시대에도 복음의 능력을 믿으므로 죄의 유혹에 넘어 지지 않고 거룩한 삶, 믿음의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22-30). 22,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많다 적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율법사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인됨을 발견하도록 할 뿐입니다. 율법의 의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좁은 길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한 규칙만 지키면 되고 그 나머지 삶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등 몇가지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외의 삶에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많은 신자들로 인해 마지막날 큰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귀한 보혈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죄와 죽음의 권세로 부터 자유함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의 구주요 주인이 되셨습니다. 갈2:20절은 믿음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좁은 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기초해서 하나님 한 분을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입니다. 이들은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더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주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므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히 돌보시는 예수님을 인해 감사하며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주인으로 삼고 믿음의 좁은 길을 따라 매일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여기서 힘쓰라는 뜻은 경기에 임한 운동선수처럼 “필사의 노력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다가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면 중도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사람들의 조롱에 못 이겨 중도에 방주 만드는 일을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며 사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사람들은 나를 조롱한다면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주의깊게 보며 끝까지 인내하며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반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 없이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25-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그들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았고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노예상인 존 뉴톤은 마지막날 있을 3가지 일로 인해 놀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저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돌째는 저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서 놀라고 마지막은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조상들의 믿음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렸고 율법만 고집하다가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믿음의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방인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주인 삼았던 많은 이방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종족과 신분에 구별 없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선민이라는 특권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은 나중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 닫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해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9:27).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손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빌2:12).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에 종 되어 짓눌린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낮아져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는 죄와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로 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이 좁은 길로 가는 삶입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그 말씀을 깊이 신뢰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발자취를 좇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끝까지 믿음의 길 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3:10-35
요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매임에서 푸는 안식일(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귀신 들려”라는 단어는 약하게 하는 영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운명주의, 마음의 상처, 피해의식, 미움 등으로 마음이 꼬부라지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꿋꿋하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고 개척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단에 매어 마음이 꼬부라져서 기를 펴지 못하고 죄에 종노릇하며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여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꼬부라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날 때 펴지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시는 분입니다(4:18). 예수님은 꼬부라진 인생을 펴주는 분이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꼬부라진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학생들이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감으로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말했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그는 안식일 법에 매여 마음이 꼬부라져 있었고 그의 생각도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 왜 합당한가 말씀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들은 이 여인을 볼 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는가 하며 멸시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영접하셨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에 짐승을 외양간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열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여인을 하루 더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느냐 하시며 그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권세에 매인 사람, 실패에 매인 사람, 운명에 매인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와서 매인 것이 풀어지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고 모험하며 개척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나음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비유(18-21).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19).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지만 자라면 3.5미터까지 자랍니다.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겨자 나무에 깃들이는 새들은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미약하게 시작에서 지구를 덮고 이천년을 지내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가루 서 말은 한 번에 반죽하기 알맞은 양으로서 약 150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의 빵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누룩과 같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가족을 변화시키고 친구들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오늘날 복음 역사가 많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 가운데서도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죄문제와 우리 공동체의 문제, 나의 연약함과 죄문제에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가운데서도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불신의 시대, 음란한 시대에도 복음의 능력을 믿으므로 죄의 유혹에 넘어 지지 않고 거룩한 삶, 믿음의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22-30). 22,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많다 적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율법사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인됨을 발견하도록 할 뿐입니다. 율법의 의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좁은 길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한 규칙만 지키면 되고 그 나머지 삶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등 몇가지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외의 삶에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많은 신자들로 인해 마지막날 큰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귀한 보혈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죄와 죽음의 권세로 부터 자유함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의 구주요 주인이 되셨습니다. 갈2:20절은 믿음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좁은 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기초해서 하나님 한 분을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입니다. 이들은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더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주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므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히 돌보시는 예수님을 인해 감사하며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주인으로 삼고 믿음의 좁은 길을 따라 매일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여기서 힘쓰라는 뜻은 경기에 임한 운동선수처럼 “필사의 노력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다가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면 중도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사람들의 조롱에 못 이겨 중도에 방주 만드는 일을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며 사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사람들은 나를 조롱한다면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주의깊게 보며 끝까지 인내하며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반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 없이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25-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그들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았고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노예상인 존 뉴톤은 마지막날 있을 3가지 일로 인해 놀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저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돌째는 저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서 놀라고 마지막은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조상들의 믿음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렸고 율법만 고집하다가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믿음의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방인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주인 삼았던 많은 이방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종족과 신분에 구별 없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선민이라는 특권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은 나중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 닫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해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9:27).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손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빌2:12).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에 종 되어 짓눌린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낮아져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는 죄와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로 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이 좁은 길로 가는 삶입니다. 우리 JBF 학생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그 말씀을 깊이 신뢰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발자취를 좇는 삶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끝까지 믿음의 길 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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