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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요한 박사님 소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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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1건 조회 2,576회 작성일 05-05-31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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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of John CS Jun.

<img src="http://snu5.ubf.or.kr/bbs/data/notice/P1010146.jpg">
주님께 잡힌 바 된 것을 좇아가노라



요절 /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I. 가난한 과부의 둘째 아들

저는 1941년 6월 27일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일산리 이부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는 저희 집은 부농의 대가족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홀어머니는 여섯 마지기의 논과 두 마지기의 밭을 분배받아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부농의 집에서 가난한 과부의 둘째 아들로 신분이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4살 때 몸이 아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다가 야곱처럼 한의사의 손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어렸을 때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활발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분교인 창평북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저희 집에서 학교까지 8km의 거리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매일 아침 책보를 허리에 붙여 매고 학교까지 마라톤을 해야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때문에 초등학교에서 축구선수, 높이뛰기, 넓이뛰기 선수가 되었습니다.



저희 형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여 광주에 있는 1류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가난한 저희 집 사정으로 저는 중학교를 갈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서 진학반에 들지 못했으나 우등으로 졸업을 하고 농사일에 전념을 해야만 했습니다. 새벽부터 열심히 논에 가서 농사일을 하고 집에서는 염소, 돼지, 개, 2백 마리의 오리를 키우고 1,000평의 집 뜰에는 감을 많이 가꿨습니다. 그 결과 졸업 1년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처럼 저희 농사와 가축을 크게 축복하셔서 제가 중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광주시에서 변두리인 시골에서 싼 방을 얻어 형과 같이 자취를 했습니다. 그 당시 6.25 직후라 정규 버스가 거의 없어서 자취를 위하여 저는 시골에서 쌀, 김치, 땔감인 장작을 어깨에 매고 어떤 때는 16km의 거리를 걸어서 자취방까지 가져가기도 했고 재수가 좋을 때는 트럭을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중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1956년에 그 당시 1류 고등학교였던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최고 선생님들에게 배울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1년 늦게 중학교를 들어왔기 때문에 열심히 새벽부터 공부를 하여 이를 따라잡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오늘날과 같이 방에 스팀이 되지 않으므로 어떨 때는 방에 있는 잉크병의 잉크가 얼어서 잉크병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별로 좋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새벽 5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억지로 무리하게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공부만 하면 두통이 매우 심하고 불면증이 있고 근육의 경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시간에는 꽉 째인 모자를 쓰고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희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1년간 휴학을 하도록 권면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슬슬 쉬면서 학교공부를 했고 옛날 공부했던 실력으로 해양대학교와 전남의과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선배님들의 권유로 전남의과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경쇠약이 매우 심하여 공부만 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불면증이 심한데 내가 과연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의과대학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이것은 저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를 위해 27세의 젊은 과부로서 청춘을 희생하면서 저희 3남매를 키우고 가르치신 홀어머니를 위해 제가 악착같이 성공을 하여 어머님께 효도하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았습니다.



II. 한국 책임 목자로 부르신 하나님

저는 저희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독서를 하였습니다. 약 2백권의 전기를 읽고 또한 점차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철학에 흥미를 가져 의예과에 가서는 철학교수의 자문을 받아가며 고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부터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을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읽고 필요한 것을 summary로 노트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예과 1학년 여름방학 때는 2달 동안 도시락을 싸 가지고 도서관에 와서 열심히 독서를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개똥 철학자였고 교통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도덕주의자였고 지금 생각해보면 외식자였습니다. 저는 서양사상과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경을 가르쳐준다는 UBF를 물어물어 한 친구와 같이 광주 대인동 UBF 센터에 찾아왔었습니다. 그 당시 광주 대인동에 있는 UBF 센터에는 이창우 목자님(Dr. Samuel Lee)과 Sarah Barry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당시 Sarah Barry 선교사님은 29세의 잉그리드 버그만과 같은 아름다운 미국 처녀 선교사였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2시간씩 Sarah Barry 선교사님과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 혼자만 공부를 하면 배사라 선교사님께 미안한 감이 들어 매일 새벽에 친구들을 설득을 하여 그 친구들을 심방해서 5,6명씩 센터에 데리고 와서 약 6년간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한 가운데 제가 이제까지 독서를 통해 알아왔던 인생관과 달리 더 완벽한 인생관과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신경쇠약이 치유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일 먼저 저의 의예과 친구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1:1이 없었고 저는 캠퍼스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제일 먼저 인도했습니다. 그 당시 열심히 의예과에서 양을 초청하여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했는데 저희 의예과 1학년 80명 중 한때는 60명이 UBF 그룹 바이블 스터디 멤버가 되어서 UBF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하게 되면 학교 실험시간도 자동 휴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신 자전차를 다니면서 여러 양을 심방하며 양육했습니다. 의대를 다닐 때는 정규해 형제와 이남균 형제를 제자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꽁초 담배만을 피우고 시골에 있는 girl friend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코스모스 꽃을 넣어서 보내는 낭만적인 형제였습니다. 저는 그 형제를 돕기 위해 매일 일찍 학교에 나가서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아주고 같이 식사를 하고 도서관도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아서 항시 같이 공부를 하며 제가 요청을 하면 그는 무엇이든지 yes, yes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센터에 가자고 했을 때 그는 yes 하였습니다. 그가 성경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서 목자의 인생을 살고자 했을 때 저는 가난한 그를 저의 방에 초청하여 무료로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UBF 최초의 공동생활 역사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의과대학 시절에 매일 새벽마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6년간 했습니다. 제가 미국의사시험(ECFMG)에 합격을 하여 UBF에서 첫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간구했습니다. 열심히 미국의사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전기 X-ray 검사결과 폐결핵 경증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폐결핵이면 미국의사시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절망이 컸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그때 이창우 목자님(Dr. Samuel Lee 선교사님)이 저를 심방하여 다음과 같이 카운셀링을 했습니다. 나와 전요한 목자는 조상이므로 선교사로 나가는 것보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그룹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힘을 주시고 카운셀링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64세에 미국선교일선에 가게 된 것은 제가 그 당시 6년 동안 줄기차게 드렸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45년 만에 응답이 되어 오늘 선교사로 가게된 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고 45년만에도 응답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당시 UBF 초기에는 지금과 같이 1:1, 요회가 없었습니다. 대학 2,3학년 때 저는 이미 시니어 목자로서 여러 양들의 문제를 카운셀링해 주는 은사가 있다고 해서 카운셀링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때는 7,8명이 저희 카운셀링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고 저는 적은 room에서 차례로 카운셀링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심방을 많이 하고 카운셀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 당시 평신도 목자가 되어서 많은 양들을 심방하고 양육하고 또 카운셀링해주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결혼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의과대학교 4학년 때 지금 저의 동역자인 김선지 자매 목자는 농대 화공과를 졸업한 부자집 딸이었고 그의 큰오빠는 학장이었고 언니와 형부는 교수님이었고 또 그 당시 탤런트와 같이 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UBF 내에서는 학사로서 적당한 결혼상대자가 없었습니다. 책임목자이신 사무엘 목자님은 이 문제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캐나다 유학 시험에 합격한 시니어 목자를 김선지 자매 목자와 결혼을 하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목자님은 그 결혼에 대해서는 확신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시니어 목자와 김선지 자매 목자가 김선지 목자의 집에 가서 결혼승낙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때 사무엘 목자님은 전요한 목자가 따라가서 결혼승낙을 받도록 도우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순종하여 김선지 자매 목자의 큰오빠인 김 교수님과 만나서 그 시니어 목자가 캐나다 유학생으로 가게 되고 또 앞으로 얼마나 장래가 촉망되는가 또 그 분이 이 결혼에 얼마나 합당한 분인가를 입이 마르도록 열심히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선지 자매 목자의 큰 오빠는 결국 승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무엘 리 목자님은 저를 한쪽방으로 오라고해서 조그마한 팔뚝 시계를 선물하시고 전요한 목자가 직접 김선지 자매 목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심히 당황했습니다. 김선지 자매 목자는 부자집 딸이요 너무 미인이어서 저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마치 평강공주와 온달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직 학생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무엘 목자님의 기도 가운데서 하신 말씀을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러면 제가 하지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교사님의 방향에 따라서 저는 바로 김선지 자매 목자의 오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김선지 목자의 오빠는 하루 전에는 친구가 결혼적격자라고 주장하더니 이제는 자신이 적격자라고 말하니 너무 코메디 같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적극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7개월 후에 의대를 졸업하고 1969년 1월 3일에 House Church를 이뤘습니다. 저는 광주기독병원에서 내과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977년 4월 30일에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서울 시내 모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저는 제대인사차 그 당시 Dr. Samuel Lee 선교사님께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 당시 사무엘 선교사님은 세계개척을 위해 미국 선교사로 50세에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교사님은 저에게 전요한 목자가 자신의 후임으로 한국 UBF 디렉터 직분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제일 먼저 저의 홀어머니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스탭 훈련도 받지 않고 이미 많은 스탭들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한국책임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 저를 스탭으로 부르신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부르실 일이지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후에 부르신다 말입니까? 그러나 저는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고 배사라 선교사님과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 결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로마서 10:l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저는 이 말씀을 통해 내가 영적으로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어찌 그들이 듣고 믿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스탭 목자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저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고 영적인 리더로서 인간적인 능력을 갖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목자님은 제가 UBF의 최고선배 중 하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가 능력이 있어서 저를 부른 것이 아니고 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부른 것으로 영접을 하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영적인 권위 Dr. Samuel Lee 선교사님의 뒤를 이어 전국책임목자와 종로 2부(학사회)의 책임목자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골리앗과 싸우기 전 다윗처럼 사울왕의 갑옷을 받아 입었을 때와 같이 어색하고 옷이 너무 컸습니다. 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남모르는 많은 영적인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종로 학사회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도 전라도 사투리를 메시지 쓰는데서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당시 말씀의 종으로 양떼들을 섬기기 위해서 금요일부터 주말은 센터에서 자고 기도하면서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하도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여서 말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저에게 제일 어려운 일은 전국 디렉터로서 선장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수시로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3번 센터 건축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1978년에는 본부센터요 종로센터인 3층 센터 건축역사를 섬겼습니다. 물론 그 당시 김모세 목자님이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1998년에는 3년 동안 본부 센터 건축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 반대하는 산발랏이 하도 많아 저는 대부분의 머리가 그 당시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이와 같이 아름다운 선교센터를 건축하여주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센터 건물 건축을 하는 것으로 오는 유익보다는 센터 건축을 위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영적인 유익이 더욱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관악 3,5부 센터 건축을 하였습니다. 저는 98년부터 서울대학교 개척을 위해서 관악3부 목자의 직분도 겸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매주일 종로에서 11시와 2시 반 메시지를 전하고 차를 타고 가서 5시에 관악 3부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밤 8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관악 기도모임과 요회 목자 보고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동안에 매주일 4시에 종로에서 출발하여 5시까지 도착을 하여 메시지를 빠뜨리지 않고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데모로 인해 종로와 서울역이 완전히 데모대에 의해서 막히고 경찰서 교통과로 전화를 하여 잘 빠져 나가는 길을 물어서 헐레벌떡 도착하여 메시지를 전할 때도 있었습니다. 관악 3부 센터 건축을 위해서 지난 98년에 IMF로 인해 땅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센터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2개의 집을 동시에 계약을 하여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를 007 부지 매입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2001년에는 종로 1부에서 정아브라함 목자님을 책임목자로 세우고 관악 5부 개척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최고 대학인 SNU 개척을 위해 UBF가 관악 1부, 3부, 5부를 세우고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명실공히 서울대 캠퍼스 개척을 위해서 학생단체에서 가장 많은 리더들이 개척역사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간 제가 한국 책임을 맡았을 때 전국 주일 집회가 650명이었는데 2000년대까지는 10배의 성장의 역사가 있었고 약 2,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85개국을 개척하는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종로 학사회는 시작할 때 약 주일집회가 90명이었는데 2000년대까지는 약 10배의 성장의 역사가 있었고 14개 챕터를 개척하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UBF를 통해서 성령으로 크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신 것은 저 한 사람의 믿음과 능력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잘 알다시피 자신은 사무엘 선교사님과 같은 카리스마와 영적인 지도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 스탭 목자님들이 성령의 그릇을 굳게 이루고 각 챕터 요회 목자님들의 헌신과 기도를 축사하사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룬 줄 믿습니다.



제가 그 동안 목자로서 가장 힘써 왔던 것은 매일 아침마다 제가 그 전날에 나의 죄와 한국과 전세계 형제자매님들의 죄를 회개하고 중보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절을 보겠습니다.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제가 선교일선에 나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힘써서 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혜의 능력인 영인 충만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12). 저는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면서 요절로서 빌립보서 3:12,14절을 잡았습니다. 그간 28년 동안 내가 이미 얻고 완전히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제 사역에 있어서 제 2기를 맞이하여 저는 세계개척을 위해 미국으로 가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내가 무엇을 이뤘다고 포만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새롭게 출발코자 합니다. 저는 영적인 면에서 예수님께 잡힌 바 되고 예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성령의 충만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둘째, 저는 세계책임자로서 분명한 푯대를 잡고자 합니다(14). 2010년까지 전세계의 배가의 역사를 이루고 2041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전세계 캠퍼스 개척역사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분명한 실천세부계획을 가지고 줄기차게 기도하며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 동안 전 세계 선교일선에서 피땀이 나도록 수고하신 여러 선교사님들과 한국 여러 목자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사랑과 섬김과 기도를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전요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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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한님의 댓글

이요한 작성일

  전요한 목자님은 역시 하나님의 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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