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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낄(kiel) 오한나 선교사님 선교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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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527회 작성일 07-07-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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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1. 우상 숭배하던 가정에서
저는 충남 양촌면 모촌리에서 1951년 8월16일 1남 6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저 위 첫아기를 잃고 마음에 슬퍼하시던 중 제가 태어나므로 위로와 기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첫째가 죽음으로 저는 둘째로 내어났지만 첫 딸이 되었습니다. 대가족에서 온 가족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의 아버지는 공무원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하시고자 있는 재산을 다 팔아 대전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성적이 좋은 것을 보시고 저희 보모님들은 저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형편과 동생들이 만아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간호고등학교에 등록했습니다. 사업에 경험이 없으신 아버지께서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가난이 저의 가정에 덮쳤습니다. 저의 가정에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어머니께서 딸만 줄줄이 낳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딸을 낳으실 때마다 아기에 대한 기쁨보다 슬퍼하시고 부끄러워 하셨습니다. 저는 큰 딸로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괜히 부끄러웠습니다. 동내 사람들은 아들이 없는 가정을 동정하며 함께 걱정해 주었습니다. 저의 가정은 딸 많다는 것으로 인하여 온 동네의 동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정의 인사와 오가는 말들을 듣기 싫어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피하여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잘 모르던 하나님께 맹세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가정에 남동생을 주시면 하나님을 잘 믿고 목숨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저의 어머니는 7딸을 낳으신 후 8번째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남동생을 얻고 나니 저희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2. 외국인 노동자로
막내 남동생이 태어 난지 6개월 되던 때 저희 가족의 문제가 풀려 행복하다고 할 때, 기쁨으로 채워졌을 때 저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남 육녀와 가정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만 남겨 두시고 가셨습니다. 갑자기 사랑하던 아버지의 사망을 보고 저는 큰 충격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아버지를 앗아간 죽음을 한동안 믿지 못하고 방황하였습니다. 낮에는 사람들 가운데서 혹시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의식해야 되는 괴로움이 커서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저의 친척들은 저도 모르게 독일 간호사로 갈수 있도록 모든 수속을 다 해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개월 째 저는 고국에서 밀려나다시피 독일에 간호사로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1월 22일 서 Berlin Tempelhof공항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안개가 끼어 어두침침하고 비는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독일 날씨는 저의 침울한 마음과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햇볕이 환하게 나면 오히려 에덴과 같던 독일 주택가를 보기 싫어했습니다. 처음에는 오직 동생들과 어머니를 위해 살고자 결단하고 고국에 있는 그들을 잘 보호해 달라고 늘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저를 늘 따라 다녔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숙사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서 자주 산책했습니다. 무덤 앞 비석에 새겨 있는 출생 사망 연월일을 보며 인생은 그림자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단정을 스스로 내렸습니다. 저는 인생 목적을 자기개발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대한 소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체류 계약이 끝난 후 많은 친구들은 결혼 정년기 였기 때문에 결혼문제로 귀국했습니다. 저는 소원이었던 대학공부를 하고자 독일에 계속 머물고자 했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보조해주는 장학금을 타지 못했고 가족부양과 자립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밤 근무를 하고, 야간 고등학교 다니면서 마침내 대학입학허가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독일 약 회사에 근무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약학을 택했습니다. 사망권세에 눌려 있던 저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직업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과 상관없는 직업을 갖고자 했습니다. 즉 연구소 실험실에서 실험이나 하고 사는 것이 저의 성격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망으로 약학은 시작했지만 저는 저의 생에 대한 허무와 고독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몰라 방황하였습니다. 외국생활 횟수가 늘수록 저는 본토친척 고향을 잃고 내가 설 땅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외국 땅에서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야하는 저는 매우 초라하다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했지만 저는 사실 그 진리를 찾지 못해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의 내면에 이중성이 많은 것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 때 저의 심정은 빼빼마른 나뭇가지와 같았고 삶에 방향을 잃고 한숨만 쉬고 살았습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일 될찌라.
제가 이렇게 내적으로 매 말라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80년도 초기에 독일로 UBF학생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셨습니다. 친한 친구였던 안룻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왔다며 방문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인사차 친구를 방문했습니다. 기독교국에 무슨 선교를 한다고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한국에서나 잘하지 하며 친구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대단히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체류 목적과 복음역사를 의심했습니다. 안룻 선교사님은 또 이사했다면서 또 방문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인사차 koln으로 이사 간 룻 선교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저를 꼭 붙잡고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말씀공부에 거절을 못하여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말씀에 감화 감동을 받게 도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까지 교인으로서 주일마다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말씀을 하나님과 같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장4절 말씀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하나님의 빛이라는 말씀은 저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사망권세에 짓눌려 있던 저에게 빛 되신 예수님께서 내면의 어두움을 거두시고 빛 되신 예수님께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독일 땅에 그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저의 이 매 말라 가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주는 자를 못 만났습니다. 하지만 한국 UBF 선교사님들은 언어와 생활유지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말씀과 기도로 저를 섬겨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사님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씀에 대한 기쁨으로 방학이 되면 Berlin에서 koln으로 비행기를 타 가면서까지 말씀공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1982년 처음으로 Rehe에 있었던 여름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수양회 제목은 “열매 맺는 삶”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5 말씀은 저를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힘만 믿고 살고자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저와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을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 그래서 예수님 없는 생활은 실패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 없는 저의 삶은 실패요, 불소시게 감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15:6 “사람이 내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 말씀은 저의 매 마른 심령과 같았고, 그 결과를 예고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불소시게 인생을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에 태워 심판받을 인생을 구원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저는 그때부터 계속하여 방학 때마다 말씀 공부하러 갔습니다. 창세기 1:31절 말씀으로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딸이 많은 가정에서 여자로 태어나 슬픈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 안에서 성에 관계없이 얼마나 기쁜 존재인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한 가정의 가난으로 외국 땅에 노동자로 온 슬픈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제가 하나님 앞에서 참 기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 가치를 찾았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고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생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 믿음의 선지자들과 같이 이국땅으로 내보내셨는데 저는 그때까지 그 뜻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국인이라는 의식을 버리게 되고, 미워하던 독일학생들을 친 형제 자매를 대하듯이 품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설 땅이 어디냐며 외치던 슬픔이 변하여 축복의 땅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임을 믿고 내 뼈를 이 땅에 묻고자 했습니다. 저는 창세기 12:2 말씀을 감사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살고자 저의 거주였던 Berlin을 떠나 Berlen FU 대학 약대를 졸업한 후 실습과정을 거쳐 약사고시를 보게 되는데 이를 위해 정해졌던 실습장소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저는 복의 근원으로 살고자 Koln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의 복음정신과 희생적인 삶에 감동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주위 사람들은 있어도 없다고 하는데 선교사님들은 없는 부족한 생활가운데 에서도 헌신하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습니다. 저와 같이 약하고 나이 많은 양도 끊임없이 기도해 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사랑에 매우 감동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 선교사님은 저를 왕 노처녀라 하시며 결혼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1985년 봄에는 선교사후보로 한국에서 시온성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살고자 하시던 한국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을 보며 또다시 감동했습니다. 저는 독일 노동자로 살면서 제 3국에서 왔다는 서러움이 있었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한탄해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도전하고자 하시던 목자님들의 삶을 보고 어찌하든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독일에 계신 선교사님들에 대한 의심과 판단하던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현지에서 수고하시던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위대한 것인가 깨닫고 선교사님들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영적으로 교만이 많은 자입니다. 로마서 1장5절 말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나의 의지로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영접했습니다. 저는 독일 지성인의 성경선생이요 목자가 되고자 다시 결단했습니다. 저는 많은 동역자 가운데 뚜렷한 정체성을 못 찾아 불평이 많았습니다. 저는 스스로 간호선교사도 학생선교사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라며 외톨이라고 소외감을 갖고 동역자님들과 동역을 잘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1986년 5월 실습수련을 마치고 다시 제 2차 선교훈련을 받고자 귀국했습니다. 전선지 선교사님은 저의 믿음을 도우시고자 인내심과 어머니의 심정을 품고 말씀과 기도로 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믿음과 비전이 충만한 오베드로 선교사와 선교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양마가 목자님의 주례와 많은 목자님의 축복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인을 믿어 순종케하는 선교가정으로 세우셨습니다.

4. 복의 근원으로
1987년 1월 21일 오베드로 선교사는 Koln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인내심과 사랑이 많은 베드로 선교사는 저의 연약함과 죄를 다 감당하며 선교사의 기반을 닦고자 언어와 직업수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3차 약사국가시험 통해 변하지 않는 저를 믿음 훈련하셨습니다. 약사고시를 2차까지 합격한 후 3차에서 2번이나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세 번까지 볼 수 있는데 두 번 떨어졌기 때문에 한번 밖에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마지막 기회를 남겨두고 두려움에 매우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길을 열으셔서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독일과 한국에 계신 목자님과 동역자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험에 붙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홍해 가르고 건널 수 있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베드로 선교사를 Koln에서 훈련을 받게 하시고 1993년 3월 30일 Koln 대학 개척을 위하여 파송하셨습니다. 저는 부족한 저의 가정을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저의 가정을 개척역사를 위하여 전적으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베드로 선교사는 주중에는 근무시간 후 심방하고 양들과 말씀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주일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주말에는 베드로 선교사가 조용히 주일말씀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가정교회를 성경읽기 회관으로 사용하셔서 많은 독일 학생들이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근 14년간 저의 가정을 쓰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가정교회를 통하여 저의 두 자녀를 영적인 분위기 가운데 자라도록 하시고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Marcus 목자와 Maria 선교사 가정을 세우시고 silke 목자를 굳게 세움으로 저희 가정교회에 큰 기둥이요 기초 돌이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와 말씀으로 섬기던 양들과 목자들이 떠날 때마다 한 번씩 몰살이 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때때로 위로와 새 힘을 주셨습니다. 모든 실패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도우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4월부터 아담한 센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센터에 양들로 채우시고 12제자를 세우는 터로 사용하시길 기도합니다. Kiel UBF를 쓰셔서 Mamburg 대학개척과 12 북 독일을 개척하시길 기도합니다. Joel과 Jochebed이 독일학생의 성경선생이요 목자로 중실한 독역자로 세움 받길 기도합니다. marcus 목자, Maria 선교사 목자가정이 12제자를 세우는 가정교회로 세우시길 기도합니다. silke 박사 목자가 믿음으로 목자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매년마다 한 학생을 양으로 허락하시길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무하는 약국에서 그곳 주민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드러내셔서 이 불쌍한 죄인을 쓰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지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독일 일반인이나 많은 학생들은 기독교 국가라 자부하면서도 성경에 무지합니다. 이 땅에는 절대로 복음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비전이 충만한 성경선생을 동역자로 많이 파송하길 기도합니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홀로 한 가정이었습니다. 양들이 몰려들 때는 힘이 딸렸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통하여 동역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니다.


한마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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